“망치고 실수하고 깨질 때, 한 걸음 발전한다.” “고리타분한 스토리 위주의 만화에서 벗어나라! 파격적인 발상,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 무모함도 필요하다. 자! 덤비자 싸우자.”허영만의 선명한 필체가 작업실 벽 곳곳에 눈에 띈다. 메모광 허영만은 문하생들을 위해 짧은 단상들을 벽에 자주 붙여 놓는다. 또 건강에 대한 이슈나 하루의 계획표를 걸어 놓기도 한다. 만화에 대한 열정, 일상에 대한 애정이 여지없이 묻어난다. “스마트폰 세상이라고 하지만 수기보다 빠른 건 없습니다. 여전히 메모를 즐겨 하죠. 최근에 휴대폰을 바꿨는데 또 숙달 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습니다.”아직도 허영만은 휴대폰보다 수첩이 편하고, 터치보다 메모가 쉽다. “만화가라면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는 정석을 끝까지 유지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칭기스 칸은 ‘창작의 여지가 많은 인물’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는 다음 웹툰에서 2년 동안 연재한 작품이다. 10년에 걸친 사료 조사와 20,000km의 현장 고증을 거쳐, 칭기스 칸의 탄생부터 몽골 제국의 군주가 되기까지의 일생을 담았다. 오래 전부터 칭기스 칸에 대해 매력을 느꼈던 허영만은 마지막 역사극을 쓴다는 마음으로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를 그렸다. 자료수집을 위해 수많은 책을 읽었고, 몽골 초원을 그리기 위해 몽골을 세 차례 방문했다. 역사극은 현대극 보다 손이 더 많이 탄다. 1만 명이 싸우는 전투 장면을 그릴 때 최소 100명은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허영만은『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를 그리면서 “소설가가 될 걸 왜 만화가가 됐을까 후회했다. 소설가는 대사 한 줄이면 되지 않나”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수년 전 『식객』연재 중 머리도 식히고 구상 중인 작품 ‘칭기스 칸’ 취재를 겸해서 겨울 몽골을 방문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몽골에 대해 그다지 아는 바가 없었던 터라 기본적인 정보 수집을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보니, 돌아오는 대답은 모두 “가지 마”. 이유는 추위와 황무지, 두 가지로 압축됐다. 몽골의 겨울은 영하 25도는 우습게 생각될 만큼 강추위가 계속되고, 폭설로 인해 초원이 하얗게 변하는 탓에 울란바토르 이외에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이동의 어려움도 문제라고 했다. 작품에 들어가면 몽골의 4계절을 그려야 하므로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심정으로 결국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떠나기로 했다. 그것이 고생의 시작이었다.”(허영만의 몽골일기 中) | ||
10년 전부터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를 기획한 걸로 안다.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인가. 칭기스 칸이라는 인물에 어떤 매력을 느꼈는지 궁금하다.
칭기스 칸 이야기는 굉장히 완벽한 드라마다. 예전부터 칭기스 칸 이야기를 쓰고 싶은 생각이 있어 조금씩 자료를 모으다가 『식객』이 끝나기 직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칭기스 칸의 매력은 ‘작은 몸집인데도 어떻게 서양인에게 맞설 수 있었을까’하는 점과 ‘통신기능이 없었던 때에 어떻게 그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에서다. 전쟁하는 과정에서 말도 많이 바뀌었을 것이며,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일이 일어났을 텐데 어떻게 정복이 가능했을까. 또 땅이 워낙 넓으니 통치도 제대로 안 됐을 텐데, 반항을 하면 싹 다 죽여버리고 항복을 하면 그 사람들의 종교와 문화까지 모두 인정하는 유화정책을 펼친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몽골을 세 차례 방문했다. 몽골의 겨울은 무척 춥기로 유명한데 취재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부분은 없었나.
몽골의 겨울 날씨는 한국과 비교할 수 없다. 내가 웬만한 산악지대의 추위도 잘 이겨냈는데 몽골에서는 정말 발이 너무 시렸다. 한국에서 좋은 등산화를 신고 왔는데 소용이 없어서, 몽골 사람들이 신는 긴 부츠를 사 신었다. 몽골의 초원을 봤을 때는 정말 변한 것이 별로 없어, 과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다만 시대를 증명해줄 유물을 찾는 건 정말 어려웠다. 칭기스 칸 박물관에 갔는데 말 발굽 하나 있지 않았다. 상당히 큰 건물인데도 불구하고 외관에 칭기스 칸 동상 하나 걸려있을 뿐, 제대로 된 지도조차 찾기 힘들었다. 아무리 유목민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남겨 놓은 게 없을 수 있나, 뭘 어떻게 그려야 할 지 막연했다. 몽골에서는 사진집을 50권 정도 샀고 자료집은 우리나라에서 더 많이 샀다. 그 옛날 복식문화를 알 수 없으니 중간 시대의 복식 사진을 보면서 추정을 해 그림을 그렸다.
몽골을 여행하는 동안 ‘게르’에서도 생활했나?
물론 게르에서 잠을 잤다. 처음에 우리가 간 게르는 너무 현대적으로 꾸며 놓은 곳이라서 정말 초원 속 게르에서 잠을 자고 싶다고 말해, 다른 게르로 갔다. 그런데 현지 가이드가 예약을 하지 않고 무작정 가자는 게 아닌가. 우리가 예약을 하자고 하니, 그냥 따라오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따라갔는데, 정말 숙식이 가능했다. 유목민이었던 전통 탓인지 몽골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외부인에게 거리낌없이 제공한다고 하더라. 우리에게 침대에서 자라고 해서 일행 한 명과 침대에 누웠는데, 집 주인인 아버지와 아들이 바닥에 눕더라. 괜히 민망해서 밖으로 나와 별을 보다 들어갔는데, 그 사이에 우리의 침대에 누웠더라(웃음). 그래서 우리는 비닐을 깐 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몽골인들의 주식인 양고기도 많이 먹었나? 말에 대한 추억도 있을 것 같다.
양고기는 처음에는 구수해서 먹을만했는데, 두 세끼는 못 먹겠더라. 우리가 한국에서 가져간 밑반찬을 먹다가 몽골 사람들에게 맛 보라고 해서 줬더니 잘 먹었다. 말도 타러 갔었는데, 말이 처음엔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갑자기 속력을 내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다. 풀밭이었지만 뾰족뾰족한 돌들이 가득한 땅이었는데 떨어지면 바로 머리 깨지는 거였다.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한 작품이니 만큼, 칭기스 칸 전문가가 됐을 것 같다. 칭기스 칸의 장단점을 어떻게 파악했나.
단점은 겁이 많다는 것이다. 개를 무서워서 항상 내 옆에 개를 두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사람에 비해서는 굉장히 민주적인 사람이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잘 듣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또 부인이 밖에서 낳은 자식을 장남으로 받아준 것을 보면 관용이 큰 사람이다.
제목을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로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
칭기스 칸에 대한 책을 읽다가, “칭기스 칸은 평생 전쟁을 하면서 전쟁터를 떠나본 적이 없다. 평생 말에서 내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한 줄이 뇌리에 꽂혔다. 이거다 싶었다. 책 제목에 칭기스 칸이라는 이름을 넣으면 독자들이 무슨 이야기인지는 쉽게 파악하겠지만, 책을 집을 것 같진 않았다. 지금까지 칭기스 칸에 대한 수없이 많은 책과 영화가 나왔는데 재탕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로 지었다. 인터넷에서는 ‘말무사’로 이름을 아예 정해버린 것 같다.
국내 도서 중에도 칭기스 칸을 다룬 책이 많은데, 도움을 받은 책이 있나.
김종래 씨가 쓴 『CEO 칭기스 칸』도움을 많이 받았다. 칭기스 칸 이전 시대까지는 글이 없었으니 전부 구전되어 기록된 거라 역사책을 보면 년도가 안 맞는다. 역사극을 쓸 때는 고증이 필수인데, 칭기스 칸의 경우에는 기록된 역사가 적어 만화가들이 창작의 여지가 많은 인물이다.
이야깃거리를 보는 눈, 찾는 눈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는 화실 문하생들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연재가 불가능했던 작품이다. 무엇보다 칭기스 칸 생의 대부분이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활동 범위가 지극히 넓은 탓에 배경과 등장인물이 자주 바뀌는 문제가 큰 부담이 됐다. 이를 예상하고 연재 전 합숙 훈련을 하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으나 연재가 거듭되면 될수록 화실 문하생들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심리적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했다. 인물 잉크 작업을 하는 정세진 군은 손가락에 이상이 생겨 수술까지 받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대규모 전투 장면에 등장하는 말과 군사들을 일일이 손으로 그려야 하는 탓에 펜을 쥔 손가락에 이상이 생긴 것이었다.”(작품 후기 中) | ||
이번 작품은 『각시탈』, 『쇠풍소』 이후 30년 만에 내놓은 역사만화다. 역사극은 쉽게 선택할 소재가 아니다. 취재 기간도 현대극에 비해서 훨씬 길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도 역사극을 쓸 계획이 있나.
칭기스 칸 이야기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었던 소재이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그리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현대물도 그릴 거 많으니까 역사극은 다시 안 그릴 작정이다(웃음).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를 그리면서 소설가가 될 걸 하고 후회했다. 만화는 1만 명이 싸운 전투를 그릴 때 적어도 최소 100명 정도는 그려야 한다. 하지만 소설은 그냥 1만 명이 싸웠다고 쓰면 그만 아닌가. 역사극은 신경 쓸 것이 너무 많다. 역사를 고증해야 하니 젓가락, 숟가락 하나를 그릴 때도 조심 해야 한다. 머리 아프고 신경 쓰인다. 문하생 네 명이 이번 작업을 함께했는데, 인물 그리는 친구만 매일 늦게까지 남았다. 매일 밤 ‘이 친구가 내일 도망가지 않을까’ 걱정했다. 결국 류마티스관절염에 걸리고 치질까지 도졌다. 나중에는 미치려고 하더라. 맛있는 거 사주면서 조금만 더 참자고 했다. 그게 참 힘들었다.
힘든 만큼 뿌듯한 마음이 두 배가 되지 않나.
물론 뿌듯함도 있다. 애쓰는 만큼 독자들이 만화를 보면서 ‘장관이다’라고 감탄을 해주면 기분 좋다. 하지만 그리는 공에 비해서 효과가 적은 것 같다. 영화는 등장인물이나 사물이 움직이지 않나, 만화는 정적이고…. 만화는 영화보다 감동을 주기가 어려운 매체다.
문하생들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무엇인가.
사극을 그릴 때는 칼에 닿으면 막 베일 것 같은 기분이 들게 그리고, 전쟁만화를 그릴 때는 총을 잘 그려야 하고, 음식만화를 그릴 땐 정말 먹고 싶게 그려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예전부터 말을 많이 그렸는데, 요즘 아이들은 말을 그려본 적이 없다. 네 다리를 가진 동물 하나만 잘 그릴 줄 알면, 뼈 구조를 조금만 바꿔 기린, 코끼리 다 그릴 수 있다.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는 말 그리는 작업만 4개월 동안 했다. 말을 타고 전쟁하는 만화니까 말을 잘 그려야 한다. 말을 못 그리는 작가들은 맨날 앞모습만 그린다. 그 밑은 못 그리니까 가슴 위만 그리는 거다.
문하생이었던 작가 윤태호가 『미생』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제자의 성공을 봤을 때 뿌듯하겠다.
물론이다. 인기 많아서 기분 좋다. 『미생』은 한꺼번에 몰아서 봤다. 재밌더라. 한 달에 한 번씩 화실 출신 제자들을 만난다. 그 전에는 맨날 내가 술값을 내야 했는데 요즘엔 애들이 걷어서 낸다. 그거 굉장히 기분 좋다(웃음).
허영만의 만화는 드라마와 영화의 원작으로 많이 사용됐다. 『식객』, 『타짜』, 『비트』, 『미스터Q』등을 비롯해 최근에는 『각시탈』이 드라마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원작 제안이 올 때, 어떤 기준으로 제작사를 선택하는지 궁금하다.
우선, 이 사람이 제대로 작품을 골랐는지 파악한다. 최근에 『꼴』을 제작하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꼴』은 드라마 거리가 안 되는데, 이 사람은 작가 말만 믿고 무턱대고 잘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몇 차례 찾아오고 설득하더니 안 오더라. 지금도 수많은 제작사가 오늘 생겼다가 내일 사라지고 수도 없이 명멸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 없이 처음으로 하겠다는 사람에게는 작품을 잘 안 준다. 잡지에 만화를 연재할 때도 창간호라고 하면 가급적 안 한다. 왜냐면 아끼는 원고를 가지고 연재하는데 3,4회 나가다 잡지가 없어지면 이건 말짱 도루묵이다. 제작사가 탄탄한지를 보고, 그 다음에 누가 연출하는지, 그리고 원작료를 얼마나 주는지 본다. 원작료부터 아끼는 회사면 재정이 정말 열악한 회사일 테니까.
원작으로 사용된 작품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무엇인가.
오래 전에 방송됐던 <아스팔트 사나이>와 <미스터Q>가 괜찮았다. 가장 최근에 방송된 <각시탈>도 괜찮았다. 가끔 방송국 PD들이랑 만나면 불만을 토로한다. 왜 꼭 인물의 삼각관계가 들어가야 하는지 나는 그게 불만이다. PD들은 기본 시청률 확보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데, 좀 더 발전하려면 과감히 포기할 줄 알아야 하지 않나. 안 그러면 그 자리에 계속 머물 수밖에 없게 된다. <야망의 전설> 같은 드라마를 보면 삼각관계가 없어도 그렇게 재밌었다. 그 땐 드라마 방영시간에는 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다들 드라마 보려고 집에 있어서. 현 상태를 유지하려고 제자리걸음을 걸으면, 지금은 당장 똑같은 것 같아도 결국 퇴보하게 된다.
그릴 게 너무 많다. 소재의 한계는 없다
『꼴』, 『식객』, 『타짜』, 『비트』, 『미스터Q』, 『각시탈』등 허영만의 작품 이야기를 끝내려면 일주일도 모자라다. 태껸, 권투, 골프, 바둑, 야구, 관상, 음식, 패션 등 그의 펜에서는 늘 새로운 이야기가 창조된다. 허영만은 아직도 “그릴 게 너무 많다. 소재는 한계가 없다”고 말한다.
지금 구상하고 있는 소재는 있나.
『식객』을 다시 쓸 거고 ‘동의보감’을 소재로 한 작품을 구상 중이다. 지난 봄부터 한의사 세 명이랑 준비하고 있다. 『식객』은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하기 전에 끝나서 3년을 소비했는데 이야기를 안 한 게 너무 많다. 음식만한 소재가 없다. 작가가 연필을 놓을 때까지 제대로 무엇을 했냐고 물었을 때, 몇 개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성공한 작가다. 『식객』이 그 중 하나가 아니겠나 싶다. 완성을 짓고 싶다.
웹툰 연재로 독자를 만나는 것과 단행본으로 만나는 것은 기분이 조금 다를 것 같다.
일단 ‘말무사’는 아쉽게도 여자 독자들이 많지 않다. 『식객』은 남녀노소 다 좋아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여자 독자들이 중요해서 그리고 싶은 걸 안 그릴 순 없지 않나. 웹툰에서 연재하면서 가장 큰 애로사항은 한 커트씩 잘라서 올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온오프 같이 가는 시대니까 내가 적응하는 게 맞다. 인쇄 매체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흐름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웹툰은 컴퓨터로 작업을 하니까 파일 말고는 남는 게 없다. 파일이 깨지면 날라가 버리는 거다. 아직도 만화가 종이에 남지 않는다는 게 인정하기가 어렵다.
요즘은 전자책 시장도 활발하고 만화는 점차 웹툰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현대만화의 1세대로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웹툰의 장점은 무료라는 점이다. 일단 자기가 앉은 자리에서 언제든지 쉽게 볼 수 있다는 것, 저변이 넓은 게 장점이다. 하지만 웹툰은 만화가 무료라는 인식을 만들게 해서 과금을 하면 독자들이 만화를 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만화가의 원고료가 형편 없어진다. 이게 빨리 해결이 되어야 공존할 수 있다. 만화가들이 내 이름으로 만화를 독자들에게 선보인다는 기쁨에 웹툰 연재를 시작하는데, 생활고를 겪게 되면 투지가 줄어든다. 포털사이트와 만화가가 함께 이익을 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후배 만화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예전에 우리는 정말 그림을 잘 그리려고 애를 썼는데, 요즘 작가들을 보면 붓펜으로 쓱쓱 끄적거리고 만다. 그런 걸 볼 땐 화가 난다. 컴퓨터로 장난하는 게 자기 실력인 줄 아는 사람이 있는데, 단행본이 나왔을 때 읽히는 만화가 돼야 한다. 화실 문하생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정확한 데생을 할 수 있어야 잘 그리는 시대는 지나갔다. 표현을 재밌게 해서 독자들이 알기 쉽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국민 만화가로 불리는데 욕심 나는 타이틀은 또 없나.
‘국민 만화가’ 소리를 들으면 국민배우 안성기가 생각난다. 그 사람 참 모범적이고 활동적이다. 난 아직까지 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불러주는 거 자체에 고마움을 느낀다. 지금 65세인데 지금 할 일이 있고 목적이 있다는 게 기쁘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 그 이상 어떤 게 행복이겠나(웃음).
그의 서재엔 무엇이 있을까?
-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허영만 글,그림/이호준 글/김장구 감수 | 월드김영사
국민적 반향을 얻은 『식객』 이후, 허영만 화백이 수 년에 걸친 준비 끝에 집필한 역작. 1974년 데뷔 이래 쉼 없는 창작 활동을 계속해온 허영만 화백은 『식객』 이후 작품의 주인공으로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의 지배자 ‘칭기스 칸’을 선택했다. 칭기스 칸 시대에 몽골인이 집필한 〈몽골비사〉를 바탕으로 수많은 사료들을 조사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꼼꼼한 현장 고증을 거쳐, 광활한 대지를 누비는 칭기스 칸의 모습을 허영만만의 느낌으로 재구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