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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엄마 덕분에 누구도 부럽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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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딸들은 엄마를 긍정하면서 또 부정하면서 자란다. 한없이 엄마를 따르다가도 엄마처럼은 절대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한다. 『엄마의 도쿄』의 저자 김민정도 다르지 않았다. 일찍이 남편을 떠나 보내고 두 아이와 이국생활을 해야 했던 그녀의 엄마. 환갑을 앞두고 시한부 인생을 산 엄마를 보며, 만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자신을 만났다. 엄마의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고는 스스로의 삶을 정리할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엄마의 도쿄』를 썼다. 


'평범한 어느 모녀의 스무 해 도쿄살이'라는 타이틀을 단 『엄마의 도쿄』는 20년간 신주쿠 골든가에서 Bar를 운영했던 엄마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딸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평범한 모녀의 일상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건 저자의 담백한 필력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보편적인 감정, 모녀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을 오롯이 담아냈기 때문이다. 

 

자칭 '신주쿠 마니아'인 김민정은  16세 나이에 엄마와 함께 도쿄 생활을 시작. 아베 고보와 데라야마 슈지의 책을 번역하며 타향살이의 고독을 이겨냈고, 결혼과 출산 후에 도쿄외국어대학 대학원에서 한일 대중문화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집필 중이다. 틈틈이 한국의 여러 미디어를 통해 일본 문화를 전하고 있는데,  『엄마의 도쿄』는 먼저 하늘로 간 엄마를 추억하며 쓴 첫 책이다.


  

엄마가 없는 도쿄는 아무리 번잡스러워도 텅 빈 느낌이다. 어디를 가든 엄마를 찾는다. 단발머리에 파마를 한 중년의 여자를 보면, 혹시 엄마가 아닐까 해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이제 어디에도 엄마는 없지만 도쿄의 모든 곳에 엄마의 숨결이 남아 있다. 그 흔적을 찾아 도쿄를 걸어본다. 마음을 가다듬고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엄마를 떠나보내는 일은 그렇게 엄마의 흔적을 더듬어가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엄마의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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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선택하고 마음껏 즐겨


첫 책이에요. 『엄마의 도쿄』를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여성월간지에 3년 정도 일본의 육아에 관한 글을 연재했거든요. 첫째 아이를 키우면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블로그에 올린 게 계기가 됐어요. 자연스럽게 육아 에세이 출간 제안을 받았는데, 그 때가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1년쯤이 지났을 때였어요. 육아 에세이도 좋지만 엄마 이야기를 먼저 써보고 싶었어요. 

 

엄마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우리 엄마를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제 삶이 정리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사실 전 지금이 내 인생의 절정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거든요. 두 아이를 키우면서 얻는 즐거움이 무척 커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즐겁지 않았던, 엄마가 돌아가실 때를 기억한다는 게 너무 괴로웠어요. 가장 즐거운 시기에 가장 즐겁지 않은 걸 생각한다는 게, 참 힘들었어요. 

 


이번에 잠깐 귀국한 게, 독자와의 만남을 위해서라고 들었어요. 저자로서 독자를 만난 소감이 궁금해요.


재밌었어요(웃음). 여성 독자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남자 분은 딱 한 명 오셨는데요. 어떤 독자 분이 "엄마에게 들은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는데, "당당하게 살아라. 예쁘다. 열심히 살지 말아라"라고 대답했어요. 실제로 엄마가 제게 가장 많이 한 말이었거든요.

 

열심히 살지 말라고 하셨다고요?


네(웃음). 제가 중고교 시절을 모두 모범생으로 살았거든요. 엄마를 너무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모범생으로 지내는 것 외엔 상상을 해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제가 스무살이 되던 해, 엄마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하신 것처럼 "스무 살이 됐으니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된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남자친구를 사귀어도 되고 집에 안 들어와도 되는데, 어디에 있는지만 연락을 해달라고요. 엄마가 제게 남겨준 최상급 교훈이 있는데요. "당당한 태도로 살아. 자유롭게 선택하고 마음껏 즐겨. 그렇지만 삶의 모든 책임은 네게 있다는 걸 잊지 마"라는 말씀이에요. 


엄마가 상당한 미인이셨어요. 젊은 시절에는 서울 음악다방에서 DJ로 활동하시기도 했고. 


젊었을 때 인기가 대단하셨대요. 아빠도 엄마에게 반해서 결혼을 하시게 된 거고요. 책 뒤표지에 엄마 사진을 넣었는데, 지금 봐도 정말 세련되고 아름다워요. 엄마의 꿈은 모델이었어요. 그냥 모델도 아니고 다리 모델(웃음). 20대 때, 한 영화감독이 영화 출연을 제안한 적도 있었는데 엄마는 거절을 했다고 해요. 엄마는 요즘 말로 정말 쿨한 사람이었어요.

 

'도쿄살이 스무 해의 맛'을 보면 모녀가 정말 맛집을 많이 다녔던 것 같아요. 엄마의 요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대부분 식당 이야기에요(웃음). 심야식당 생각도 나고요. 


엄마가 결혼했을 당시에는 음식을 하나도 못했대요. 밥도 못하고.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친척들의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상황인 거예요. 할아버지 댁이 부유했던 편이라 친척들이 아이들을 많이 맡겼거든요. 그래서 엄마가 매일 해야 하는 밥 양이 20, 30명이었어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요리를 많이 하게 됐고 한국 전통음식을 많이 익히게 됐어요. 일본에 와서는 엄마랑 맛집을 자주 찾아 다녔는데, 엄마는 자기가 만들지 않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엄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간장게장이요. 일본에서는 간장게장을 먹기가 쉽지 않거든요. 엄마는 일본에서 꽃게를 구할 수 있는 철이 오면, 꼭 간장게장을 해줬어요. 남동생이랑 저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렸죠. 엄마는 음식을 잘 만드셨지만 저한테 요리를 가르쳐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남동생은 요리를 꽤 잘하는데, 저는 우리집에서 '음식 재료를 낭비하는 사람'으로 불렸어요(웃음). 늘 먹기만 하는 존재였어요. 엄마가 젊었을 때 공부에 대한 욕심이 많았거든요. 공부를 해서 성공을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딸인 저에게는 되도록 집안일을 많이 시키진 않으셨어요. 엄마는 제가 좀 더 시간을 자유롭게 쓰기를 바라셨던 것 같아요.

 

엄마들은 대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딸이 이루길 바라곤 하잖아요.  


엄마는 제가 성우나 기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엄마가 어렸을 때, 베트남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기자들이 현장에 가서 취재를 하곤 했는데, 어떤 사회적인 모순을 밝혀주고 파헤치는 그런 기자를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정작 직업적으로 저에게 어떤 걸 요구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냥 자유롭게 살고 너무 열심히 안 살아도 된다고, 대신 내가 먹을 건 내가 벌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어요.

 

일본에 정착해서 생계를 위해 엄마가 일본에 Bar를 열어야 했을 때, 딸 입장에서는 속상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렇죠. 새벽까지 일을 하셔야 했으니까. 하지만 반대를 하진 않았어요. 그건 엄마의 선택이었으니까요. 엄마는 술도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먹고살아야 했고, 엄마는 가사도우미보다는 가게를 여는 쪽이 성향에 맞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마흔이 넘었지만 엄마는 여전히 사교적이었고, 그렇게 시작한 가게 덕분에 우리는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었어요. 

 

그래도 엄마의 심야식당 '파인트리' 덕분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셨어요. 주요 단골들이 출판인, 언론인이었는데, 저자님이 후에 직업을 선택하기까지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 같아요.


직업 선택보다는 남자를 선택하는 안목이 확실히 생긴 것 같아요(웃음). 골든가에 있는 엄마의 Bar는 다섯 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작가나 기자, 편집자 이런 분들이 많이 오셨어요. 작가들이 편집자들을 만나 원고를 받곤 했는데요. 지금 기자나 작가로 활동하시는 분들이 1960~70년대 때, 일본에서 학생운동을 했는데 골든가의 식당에 들어와 숨고는 했대요. 그 때의 인연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요. 저희가 그 분들의 인생과 크게 얽히진 않았지만 제3자의 눈으로 볼 수 있었는데, 사람의 본질이 크게 다르진 않다는 걸 느꼈어요. 그게 저에겐 꽤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됐나요?


예를 들어, 제가 한국에 올 때 탄 비행기 옆자리에 한국 아저씨가 앉아 있었거든요. 저는 아이들과 같이 탔기 때문에 아저씨는 많이 불편하셨을 거예요. 비행하는 동안 저희에게 한 마디도 안 하셨고 되게 무뚝뚝했는데, 탈 때부터 내릴 때까지 저희 짐을 다 올려주시고 내려주시더라고요. 겉으로 보기엔 참 무관심한 것처럼 느껴졌는데 행동은 그렇지 않았던 거죠. 또 얼마 전에 제가 분식집에서 튀김이랑 떡볶이를 샀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10,500원이 나왔다고 500원을 깎아주셨어요. 그런데 말투나 표정은 엄청 무뚝뚝하신 분이였거든요.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으시고. 우리가 표면적으로 봤을 때, 불친절한 것과 그 사람의 인간성은 별로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을 볼 때 직업이나 외모, 본질 등 무엇을 보더라도 크게 다를 게 없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외모를 보지 말고 본질을 봐야 한다고 말하는데, 저는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골든가에서 알게 된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랬고요. 자신의 파트너를 정할 때는 자기한테 필요한 것이 무언지를 보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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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


자식들이 성인이 되면 엄마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잖아요. 


스무살 때까지는 엄마가 담배를 피는 게 싫었어요. 건강을 위해서라도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서른이 넘어서부터는 '그게 엄마의 취향이구나. 내가 거기까지 관여할 관리는 전혀 없구나'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엄마와 한결 멀어지면서, 한결 친해진 것 같아요. 

 

엄마를 떠올릴 때,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언제인가요?


엄마가 구강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호스피스 병동에 계셨을 때, 같이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실 때가 종종 있었는데 한 순간이었지만 그 때가 가장 좋았던 시절 같아요. 솔직히 엄마가 건강하고 우리랑 같이 살았을 때는 티격태격도 많이 했거든요. 일상의 소중함을 몰랐기 때문에 트러블도 많았어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때, 엄마가 제게 준 메시지는 정말 컸어요. 엄마는 자신이 시한부 인생인 걸 알고 있지만, 기적이 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셨거든요. 그 모습이 저에겐 정말 큰 힘이 됐어요.

 

부모를 떠나보내면 자식들은 후회하는 일이 많이 생각난다고 하잖아요. 엄마한테 더 잘하지 못해 후회되는 일도 있을 것 같아요.


엄마가 자식들한테 돈을 받는 걸 별로 안 좋아하셔서 제가 많은 돈을 드리지 못했어요. 저는 엄마가 싫어하셨기 때문에 드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더 드릴 수도 있었거든요. 그걸 못해드린 게 좀 아쉬워요. 만약에 제가 매달 조금 넉넉한 용돈을 드렸더라면, 엄마가 계속해서 가게를 운영하지 않아도 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또 엄마와 도고 세이지 미술관을 가지 못한 게 무척 아쉬워요. 엄마랑 손잡고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고 싶었는데 결국 가지 못했어요. 생각해보면 엄마랑 함께하고 싶었던 것들은 사실 그렇게 어렵거나 복잡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살짝만 귀찮은 것들이라 마음만 바꾸면 금세 할 수 있었던 것들이었는데, 번번이 바쁘거나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 벽을 넘지 못한 게, 아쉽고 또 아쉬워요. 

 

그래도 '파인트리'는 엄마의 존재를 증명하는 굉장히 소중한 공간이었잖아요.  


일본이라는 외국에서 엄마가 혼자 설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으니까요. 친구도 없고 누군가와 공감대를 만들지 못한 상황에서 파인트리는 엄마에게 정말 특별한 곳이었을 거예요. 엄마는 파인트리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경제적인 의미에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그래서 투병을 하면서도 끝까지 열고 싶어 하신 게 아닐까, 생각해요.

 

스스로를 돌아볼 때, 엄마와 닮은 점이 있나요?


꼭 닮았다고 생각되는 건, 딱히 모르겠어요. 그런데 사람이 강한 건 닮은 것 같아요. 자기 주장이 있고. 엄마와 저의 가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거든요. 사상 이런 건 버려도 되지만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의지, 그건 닮은 것 같아요(웃음).

 

두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닮고 싶은 엄마의 모습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저희 엄마는 항상 저에게  '예쁘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자라면서 누구도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정말 아무리 예쁜 여자를 봐도 하나도 부럽지 않아요(웃음). 누가 결혼을 잘했다고 해도, 그냥 '그 사람은 그렇게 사는구나' 그렇게밖에 생각을 안 해요. 일단 이렇게 저를 키워주신 게 정말 좋고요. 이렇게 예쁘다고 하면서도 항상 거리감을 두고 키워주신 것도 감사해요. 독립심인지는 모르겠는데, 예전에 아빠랑 함께 살 때도 엄마, 아빠가 밤에 둘이서만 데이트를 가는 일들이 빈번하게 있었거든요. 제가 울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웃음). 하지만 항상 엄마가 나를 제일 사랑한다는 확신은 있었어요. 혹시라도 제가 무슨 일을 저질렀더라도 저를 믿고 인정하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죠. 예전에 동생이 고등학생일 때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선생님께 걸려서 맞은 일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엄마가 학교에 와서 이렇게 말했어요. "담배를 피운 건 나쁜 일이지만 당신이 선생이라고 해서 우리 아들을 때릴 자격은 없다"고. 저도 아이들에게 이렇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희 엄마처럼 자식을 대해주면, 아이가 나쁜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에 대한 추억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 읽으면 굉장히 질투가 날 수도 있겠다는.


저도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엄마에 대해 안 좋은 기억들도 많아요. 그런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좋은 기억들만 남는다고 하잖아요. 마지막에 회상했을 때는 그렇게 나쁜 것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 것 같아요. 엄마들은 특히 딸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잖아요. 저희 엄마는 제가 무슨 색 스타킹을 신었는지도 체크하곤 했어요. 빨래를 갤 때도 엄마만의 법칙이 있어서 그걸 따라야 했고요. 되게 피곤한 성격이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 모든 게 정말 부질 없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와요. 저는 직장에 다니면서 돈을 번 후부터 조금 느끼게 된 것 같아요.  

 

좋은 모녀 관계를 위해서는 어떤 마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모녀라면 끈끈한 연대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제3자 입장이 한 번 되어보면 조금 더 돈독하게 오래갈 수 있는 사이가 될 것 같아요. 굵고 진하게가 아니라 길고 얇게(웃음), 계속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게 중요한 거잖아요. 어떤 가족들은 서로를 안 보고 사는 경우도 많던데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각자가 제3자 입장이 되어보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그리고 엄마들이 딸들에게 너무 많은 걸 강요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상담을 받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게 더 위로가 됐어요


16세부터 도쿄 생활을 시작했고, 일본에서 대학 졸업 후 잡지사 기자로 활동했어요. 평소 글 쓰는 일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중학생 때부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제가 사춘기를 겪을 시기에 정말 힘들었거든요.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시니 너무 바쁘잖아요. 저희를 돌봐주실 시간이 많지 않으셨죠. 만약 제가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더라면 문제아가 될 수 있었을 거예요. 한국에서는 아빠가 없고 가난하면, 누구나 문제아가 금세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 상황을 드러내지 않고 싶어서 그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꾸 뭘 쓰게 되고 읽게 되더라고요. 누구한테 상담을 받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게 더 위로가 됐거든요. 누군가 나처럼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됐어요. 정말 힘든 상황에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엄마의 모습이 저희에게는 큰 본보기가 됐거든요. 이 책을 쓰게 된 것도 제 개인적인 바람을 너머 누군가에게 작은 위안이 됐으면 해요.

 

대학 생활은 어땠나요?


20세가 넘은 후부터는 용돈을 한 번도 받지 않았어요. 학비도 물론이고요. 원래 전공은 정치학이었는데요. 종합정책학과라는 학부 안에 속해 있어서 대중문화와 마케팅, 정책 같은 걸 공부했어요.


근무했던 잡지사는 어떤 분야였나요?


대중잡지사에서 일했는데, 한창 일본에 한류가 들어오는 시기였거든요. 처음에는 월드컵 팀이었다가 1년 일하고 나머지는 한류 팀에서 일했어요. 당시 배용준 씨가 인기가 많았는데, 일본에 방문했을 때 열심히 취재했던 기억이 나네요.


현재 도쿄외국어대학 대학원에서 한일 대중문화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집필 중인데요.


그야말로 엄마의 영향이 커요. 엄마가 젊었을 때 서울에서  DJ를 하셨기 때문에 당시 구하기 힘든 LP판들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계셨어요. 어릴 때 그 음악들을 많이 듣고 자랐는데, 알고보니 금지된 곡들이 많더라고요. 중학생이 돼서야 선생님이 알려줘서 금지곡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왜 그 노래들이 금지될 수밖에 없었는지 다시 한 번 재고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1960, 70년대 한국과 일본의 대중문화를 비교하는 논문을 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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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산 엄마로 기억됐으면


육아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는데, 특별한 육아법이 있나요? 두 아이에게 자주 해주는 말, 행동이라던지. 


그럴 여유가 없어서 그냥 키우고 있어요(웃음). 부모들을 아이를 처음 키우게 되면 많이 혼내게 되거든요. 길을 걷다 넘어지거나 침대에서 뛰고 식당에서 크게 떠들면요. 그럴 때는 부모로서 혼을 내는 게 맞지만, 이렇게 혼내는 게 너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네가 다칠까봐 걱정이 돼서 혼낸다는 건 꼭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혼을 내더라도 이유를 설명해주려고 노력해요.

 

워킹맘 생활이 힘들진 않나요?


보통은 강의를 나가기 때문에 9시부터 3시까지는 학교에 있어요. 베이비시터는 따로 없고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다녀요. 제가 원래는 아이를 많이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아이를 낳고 보니까 소통이 되더라고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소통이 되는 게 신기했어요. 막내가 한 살인데 "맛있어?", "이게 뭐야?", "젖 주세요", "배고파요" 이런 게 다 사인만으로도 되더라고요. 제가 한때는 일본 방송국에서 정보 방송 프로그램을 했거든요. 매주 방송이었는데 제가 아무리 기획을 해도 방송이 한 번 나가면 끝인데, 아이들은 끝이라는 게 없는 제가 계속할 수 있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큰 프로젝트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되게 재밌더라고요.

 

저자님이 엄마를 추억했듯이, 두 아이도 언젠가 엄마를 회상하게 될 텐데요.


 그냥 이렇게 우리 엄마 정도로, 엄마가 자유롭게 산 사람이었다고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아이가 더 성장한 후에 한국에 정착할 계획이 있나요?


저희 아이가 한국어를 했으면 좋겠거든요.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럴 기회가 없으니까 초등학생이 되면 방학 기간을 한국에서 보내려고 해요. 남편도 동의했고요. 

 

어떤 분들에게 『엄마의 도쿄』를 소개해주면 좋을까요?


아기 엄마들, 그리고 우리 엄마 세대를 살았던 어머님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책에 나오는 1970년대 노래들을 떠올려보면 재밌을 것 같아요. 그리고 엄마의 절친이 한 분 계셨거든요. 우연히 그 분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엄마와 음악다방에서 함께 DJ를 했던 분이신데, 지금은 소식을 몰라서요. 우연히라도 이 책을 알게 된다면 그 분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성 독자라면 분명 이 책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또 다른 책을 기대해도 될까요? 


육아 에세이를 쓰고 싶어요. 또 엄마의 이야기라서 차마 모두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토대로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아빠의 죽음은 내게 인생을 더 열심히 살라고 말해주었다.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니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라고. 엄마의 죽음은 내게 알을 깨고 나오라고 말해주었다.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지 말고, 홀로 서서 이루고 싶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라고. 그 모든 죽음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 엄마도 아빠도 없는 이 세상은 슬프고 낯설지만, 한편으론 새롭다. 이 새로운 세상에 뿌리내리고, 남은 생을 살아갈 것이다. -『엄마의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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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도쿄김민정 저 | 효형출판
서울 음악다방의 매력적인 DJ, 삼대가 모여 사는 시골 부잣집 며느리, 아이 둘을 키워낸 당당한 싱글맘, 신주쿠 심야식당의 살뜰한 여사장…… 짧은 인생에 찾아온 사건들은 유난히 진폭이 컸고, 그만큼 강렬했다. 영화 같은 삶을 산 엄마였다. 엄마의 특별했던 인생을 기록하는 것은, 엄마를 떠나보내야 하는 저자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엄마의 삶은 그렇게 한 편의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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