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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문제는 재주가 아니라 인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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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9단은 만 5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목포에 있는 유달기원의 문턱을 넘으면서부터 바둑을 만났다. 그가 살아온 환경은 오직 바둑이었다. 11살 때부터 부모 없이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떠났고,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불과 마흔 셋에 제자 이창호 9단에게 모든 타이틀을 빼앗겼다. 당시에는 패배의 아픔이 쓰라렸지만 막상 모두 잃고 나니 오히려 자유로웠다.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하루에 네댓 갑을 피울 만큼 대단한 골초였지만, 1990년대 중반에 떠난 미국여행에서 “내 차는 금연구역”이라는 친구의 말에 화가 나, 주머니 속 담뱃갑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 후로 지금까지 담배를 피워본 일이 없다.

 

최고의 바둑 기사이자 세계 최다승(1935승), 세계 최다 우승(160회). 1989년 한중일 최정상의 기사들이 참가한 바둑 올림픽 ‘잉창치배’에서 세계 일류 기사를 차례로 꺾고 대회 첫 우승. 변방으로 평가 받던 한국 바둑을 세계 바둑의 중심으로 올려 놓은 조훈현 국수가 첫 에세이집 『고수의 생각법』을 펴냈다. 그는 요즘 등산과 골프를 즐기며 여생을 어떻게 보낼지 궁리 중이다. 조훈현은 “내 인생을 만들어준 스승님의 지혜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바둑은 지금 여기, 현재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바둑을 둘 때는 모든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바둑판 위에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지금 있는 자리가 최선의 자리다. 지금 이 순간이 다시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모든 꿈의 출발은 ‘지금, 여기’다.“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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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재주가 아니라 인품


바둑 책은 여러 권 쓰셨지만 에세이는 처음입니다. 재작년에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셨다고요. 


그간 썼던 책은 전문 분야니까 어려운 게 별로 없었어요. 이번 책은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들어있으니까, 생각이 많았죠. 재작년에 폐가 안 좋아서 병원에 갔는데, 암이면 이건 사형 선고라고 하더라고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죠. 죽으면 어떡하나, 또 운이 좋아서 살면 뭘 해야 하나. 그런데 괜찮다는 판정을 받았어요. 그 때 든 생각이 내일,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거였어요. 조금씩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바둑책이면 간단했을 텐데, 이건 사실 걱정되는 책이었어요.

 

어떤 독자 분은 『고수의 생각법』으로 필사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요? 이왕 쓴 거 많은 분들이 고개라도 끄덕여주면 좋은데. 그래도 반응이 꽤 좋다니까 다행이에요. 책을 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 걱정이 많았는데, 기회라는 게 항상 주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때그때 기회가 있을 때 하는 게 좋죠. 사실 책에 담긴 게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고 제가 살아온 이야기에요. 다만 저의 스승이신 세고에 선생님의 정신이나 가르침은 제3자 입장에서 보더라도 귀감이 될만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보면 조금 더 일찍 쓰실 수도 있었을 책인데요.


아직 제 자신한테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어요. 저는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이에요. 만약 제가 90, 100세에 죽는다면 지금 책을 안 썼을 거예요. 80세쯤 됐을 때 썼겠죠. 하지만 계기라는 게 있잖아요. 또 책이라는 게 혼자서 쓴다고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여러모로 잘 맞았던 거죠.

 

제목이 『고수의 생각법』입니다.


처음에는 제목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 생각이라는 게 마음이더라고요. 높으신 분들, 정신수양을 하는 분들을 보면 좋은 말씀을 많이 하시잖아요. 듣고 깨닫고 말하는 거죠. 생각이 곧 마음이라는 깨달음이 있었어요.

 

일본 유학 시절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고 세고에 겐사쿠 명예9단의 내제자셨는데,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 중에 가장 값진 것은 무엇이었나요.


사람의 도리를 배웠다는 게, 가장 소중합니다. 우리들은 뭔가를 배우고자 할 때 학원을 찾는데 그 곳에서 만나는 스승에게는 학문을 배우는 거지, 정신을 배우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저는 세고에 선생님께 정신을 배웠어요. 스승님은 저에게 이럴 때는 이렇게 해라, 저럴 때는 저렇게 하라고 단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그냥 보고 배우는 거예요. 스승님의 말씀, 태도를 통해서 그 정신이 느껴졌죠.

 

11세 때부터 9년간 세고에 선생님의 집에서 함께 사셨는데, 바둑을 배운 횟수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고요. 그 오랜 시간을 버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어쩔 수 없었죠. 제가 일본에 왜 갔겠어요. 바둑을 잘 두려고 간 건데. 일본에서는 저 혼자밖에 없었으니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죠. 선생님의 깊은 뜻은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됐지만,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어요. (웃음)

 

일본 유학 중에 세고에 선생님은 “내기 바둑은 절대 두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약속을 깨신 적이 있었어요. 내쫓기기도 하셨는데요.


열흘 정도 접시 닦기를 했어요. 그대로 한국에 돌아갈 수는 없었으니까 어떻게든 스승님이 화를 푸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죠. 당시에는 스승님이 왜 그렇게까지 혹독하게 하시는지 이해가 안 갔어요. 제게 제자가 생기고 스승이 되어서야 이해가 됐어요. 스승님은 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제가 1인자가 될 재주가 있다는 걸 아셨어요. 문제는 재주가 아니라 인품이었죠. 바둑 명인에 걸맞은 인격과 품성을 만들어주고 싶으셨던 거예요. 선생님의 원칙은 혹독했지만 덕분에 제가 사람이 됐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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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수를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창호 9단을 제자로 받았을 때, 스승으로서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저는 세고에 스승님과 같은 경지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스승이 돼야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어요. 인품과 인격을 어떻게 가르치겠어요. 매너는 가르칠 수 있어도 인품은 못 가르쳐요. 다만 스승이 중심을 잡고 있으면 제자가 알아서 보고 배워요. 인성, 인품, 인격은 그냥 보여주는 거예요. 자기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거죠.

 

처음 이창호 9단을 봤을 때는 “바둑은 강했지만 천재성이 보이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세계적인 기사가 될 거라는 확신은 없었어요. 그런데 포기할 수 없는 기이한 느낌 같은 게 있더라고요. 저랑은 많이 달라요. 제가 빠르고 날렵하고 다소 공격적인 바둑을 추구하는 반면, 창호는 느리지만 두텁고 묵직해요. 성실하고 온화한 성격과도 관련이 있죠. 저는 도박을 하지만 창호는 안전한 길을 선택하는 유형이에요. 뼛속부터 다르죠.

 

1998년 28기 최고위전에서 사상 최초 사제 대결을 펼쳤는데, 0.5집 차이로 이창호 9단에게 패하셨습니다. “다른 기사들은 물론 나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내 허점을 창호가 봤다”고 평가하셨는데요.


창호는 저를 이기기 위해 나를 연구했어요.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지, 빈틈이 어디인지를 집중적으로 파고든 거죠. 처음 창호에게 타이틀을 빼앗겼을 때는 너무 괴로웠지만, 어차피 빼앗길 거라면 내가 직접 키운 제자에게 빼앗기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고 나니 모든 게 거짓말처럼 괜찮아지더라고요. 승부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요.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해요. 이길 수 있으면 이겨야 해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반전의 기회를 기다려야 해요. 제가 버텼던 이유는 이겨야 한다는 욕심이 아니라 아직 이길 기회가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어요.

 

이창호 9단은『고수의 생각법』을 읽고 어떤 이야기를 하던가요?


아무 말도 없었어요. 할 필요도 없고요. 좋은 책인지 아닌지는 자기가 알아서 읽고 판단할 일이죠. 일단 책이 나왔으니까, 내 제자니까 한 권 준 거예요. 뜻이 있어서 준 것도 아니고요. (웃음)

 

바둑에서 꼭 해야 하는 일로 ‘복기(復棋)’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바둑은 제대로 복기를 안 하면 성장할 수가 없어요. 오히려 더 공부가 돼요. 바둑은 경기잖아요. 잘못하면 지는 거니까. 그 원인을 열심히 파악하는 게 필요하죠. 인생도 그래요. 사람들이 피곤하니까 안 하는 건데. 어제의 반성을 통해 내일의 성장이 있는 거잖아요. 마음이 없는 것뿐이지, 10분 덜 자고 운동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조금만 시간을 내고 마음을 쓰면, 할 수 있는 거예요. 일만 하는 게 제일 안 좋아요. 10분, 20분만이라도 짬을 내서 미래 생각도 하고 과거 생각도 해야죠. 사람들은 다 꿈을 먹고 살잖아요. 공상도 하고 반성도 하고. 지금 현대인에게는 굉장히 더 중요한 시간이에요.

 

바둑을 두면서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매 판이 질문이니까요. 다음에는 어떻게 둘 것인가, 그것 말고 더 있겠어요? 딱 한 수로 끝나지 않으니까요. 최선의 수를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생각을 하죠. 모든 것이 그렇지만 바둑도 실전에서 결정 나는 거니까요.

 

인생에 있어서는 어떤 질문을 하고 계신가요?


스승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어떻게 전하냐, 그거예요. 스승님이 자신의 삶을 통해 제게 말한 건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에요. 좋은 인품을 갖추라는 말인데, 그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그건 누구한테 딱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저절로 키워지고 갖춰지는 것 같아요. 정말 가르쳐준다고 알 수가 없어요.

 

젊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많죠.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건 알지만, 너무 즉각적이라고 할까요? 충동적인 면이 많은 것 같아요.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답이 나올 텐데, 손발이 먼저 나가는 모습을 볼 때는 조금 안타깝죠. 기본적으로 최선을 다하면서 살면 크게 어긋난 인생은 아니라도 봐요. 다 재벌이 되고 대통령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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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두는 수에 책임을 져야 한다


1995년에 금연을 결심하고 곧바로 성공하셨어요. 평소 하루에 담배 3갑을 필 정도로 애연가이셨는데.


쉽게 끊은 편이었어요. 미국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이미 절반쯤 금연에 성공한 상태였으니까요. 이후로 밥이 맛있어지더라고요. 원래 저는 식욕이 없는 편이어서 밥 한 공기를 비우는 게 되게 어려운 사람이었거든요. 낯빛도 좋아졌고 살이 찌면서 체력도 좋아졌죠.

 

금연을 한 뒤로 건강은 물론 바둑 성적도 좋아지셨잖아요. 주변 분들에게 금연을 권하진 않으셨나요.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 권유를 할 수가 없어요. 내가 골초였는데 누구한테 담배를 피지 말라고 하겠어요. 담배는 옆에서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어요. 본인이 끊으려는 의지가 있어야죠. 금연을 마음먹은 사람에게 금단 증상 같은 건 이야기해줄 수 있는데, 담배 피는 사람한테 “너 끊어”라고는 말 못해요. 본인의 마음이니까요.

 

한국기원은 1999년부터 대국장 완전 금연제를 실시했습니다. 지역의 모든 기원도 이제 흡연실을 따로 두고 있고요.


입단 연령이 점점 낮아지면서 어린 아이들이나 청소년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한동안은 예선전을 흡연실과 금연실로 나눠서 치르기도 했죠. 요즘 가끔 우연히 담배 냄새를 맡으면 그리울 때가 있긴 해요. 그래도 피진 않아요.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지 담배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거든요.

 

예전만큼 바둑인구가 많지 않습니다. 바둑을 배우는 어린이 숫자도 줄고 있고요.


바둑이 나빠서, 안 좋아졌기 때문이 아니에요. 다만 오락 거리가 너무 많아진 거죠. 컴퓨터 게임, 스마트폰 게임이 훨씬 접근하기가 편하잖아요. 놀이문화가 많이 생기다 보니 분산이 된 거죠. 옛날 같았으면 10명이 바둑을 뒀다면 이제 1,2명 밖에 흥미를 갖지 않아요. 달라진 거죠. 중국 같은 경우에는 정부 차원에서 지원을 많이 해줘요. 바둑만 잘해도 일류대학을 갈 수 있어요. 모든 힘이 합쳐지니까 발전할 수밖에 없어요. 바둑 인기가 대단하죠.

 

어릴 때 바둑을 배우면 어떤 면이 좋나요?


바둑은 내가 두는 수에서 책임을 져야 해요. 나름대로 생각을 해야죠. 두뇌 개발이 좋다는 건 과학적으로도 입증됐지만, 무엇보다 좋은 점은 차분해진다는 거예요. 성질이 급하면 못 앉아 있어요. 바둑은 한 번 배워놓으면 웬만하면 실력이 확 줄지는 않아요. 운동 같은 경우에는 연습을 덜하면 실력이 급격하게 줄지만, 바둑은 그렇게 확 내려가진 않아요. 최종 컨디션은 떨어지겠지만, 한 번 배워놓으면 웬만큼 잊어버리는 경우는 적어요.

 

얼마 후, 조치훈9단과 특별 대국이 열립니다. 어떻게 준비하고 계신가요? (인터뷰는 7월 26일 이전에 진행됐습니다)


준비라고 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준비를 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요. 지금을 제가 일선에서 싸우는 게 아니고 흘러간 경기를 하는 거니까요. 최고의 기량을 보인다는 의미보다는 옛날 추억을 생각하면서 요즘은 어떤가? 하고 두는 거죠. 편하게 두려고 해요.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합니다.


제가 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는데요. 앞으로는 어떻게 보답을 하며 살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봐야겠죠. 책을 낸 것도 하나의 보답일 수 있을 거예요. 이제는 내리막길인데, 내려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90도로 내려가느냐, 10도로 내려가느냐를 따져보면 그래도 후자가 낫지 않겠어요? 운이 좋으면 더 올라갈 수도 있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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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조훈현 저 | 인플루엔셜
조훈현은 우리가 후회 없는 나만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나만의 생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확신을 가진 ‘나만의 결정’을 내리고 ‘나만의 인생’을 찾기까지, 그 과정은 기약이 없는 길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일 수 있다. 분명 ‘생각’은 인생을 바꿀 수 있지만, 어떻게 바뀔지 장담할 수 없기에 두려움이 앞설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하는 일을 멀리하거나 멈춰서는 안 된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먼저 불안하고 걱정하는 이들이라면 실패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좌절하고 상처를 입은 이들이라면, ‘생각의 힘’을 몸소 깨달은 조훈현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을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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