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집이 나온 것도 아닌데, 김소연 시인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제목은 ‘시인 특집’. 시인으로 사는 일상이 궁금하다고 묻자, 시인은 흔쾌히 수락을 하며 “시인을 돌봐주셔서 무엇보다 기쁘고요.”라고 말했다. 돌봐준다, 돌봐준다?! ‘돌보다’의 뜻을 곰곰이 살피게 됐다. 우리는 분명, 처절했을 때 한 편의 시를 읽고 상처에 연고를 바른 기억이 있지 않은가. 시인으로부터 돌봄을 받았던 우리가 아니었나? 외지는 못해도 한 편의 시에 대한 빚이 있지 않을까. 상투성이 없는 시인에게 상투적인 질문을 해보고 싶었다. 먼저 안부를 물었다.
1993년 계간 <현대시사상>을 통해 등단한 김소연 시인은 1996년 첫 시집 『극에 달하다』를 펴낸 후, 2006년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2009년 『눈물이라는 뼈』, 2013년 『수학자의 아침』등 세 권의 시집을 더했다. 최근에는 에세이집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의 공저자로 참여했다.
내가 감응하고 변할 때마다 쓰는 시도 변했으면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친구 시인 유희경, 송승언, 신해욱, 하재연이랑 디자이너 김재연 씨와 함께 독립출판으로 잡지를 만들고 있어요. 지금 제작 단계에 있어요. 12월 말에 나올 예정인데, 소셜펀딩 사이트 ‘텀블벅’이랑 SNS에서 홍보를 하기 시작했어요. 재밌게 하고 있어요. 2년동안 준비를 했는데, 텀블벅에 내건 첫 문장이 ‘우리는 1년동안 회의만 했다’예요. 회의를 오래 해서 지난했기도 했지만, 모두의 의견을 반영하고 세세하게 의논하면서 합의를 보는 과정들이 좋았어요. 굳이 우리가 새로운 잡지를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지부터 찬찬히 헤아려나갔어요. 우리의 작품들을 받아줄 지면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자주 마감에 허덕이기까지 하는 가운데에서도 우리만의 매체가 필요했어요. 왜지? 하고 계속 질문을 해왔던 것 같아요. 그러니 회의만 1년 넘게 하다가 이제 원고를 모두 취합했고 어떤 잡지가 나올지 가늠할 수 있게 됐어요. 우리는 '눈치우기'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기로 했고, 창간호 제목은 『조립형 text』예요. 서로의 텍스트에 마음껏 영향을 받아서 텍스트에 꼬리를 무는 내용들로 채워졌어요. 앞으로 원하는 글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분량만큼 마음껏 써나갈 생각이에요.
독립출판이 지금 붐이라고 하는데요. 독립출판물을 파는 작은 책방이나 카페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이렇게 많아질 줄은 몰랐어요. 우리가 회의를 시작한 2년 전까지만 해도 붐이라는 게 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고 방법이 많이 보이는 시기이긴 했어요. 시집을 비롯해서 자기 책을 꾸준히 출간하고 있다지만, 완전히 자유롭지 않거든요. 가령 시집을 낼 때도 대개 출판사의 시인선에 포함돼서 나오잖아요. ‘여기에 사진을 쓰겠다, 테두리는 안 하고 판형은 다르게 하겠다’ 등의 의견을 시인이 제시하게 되더라도 관철되기가 어려워요. 출판사의 시리즈 형식에 맞춰 내는 게 대부분인데, 내용에서부터 책이라는 물성에 이르기까지, 자발적이고도 자유로운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한겨레>에 ‘김소연의 볼록렌즈’를 연재 중이신데, 글자수가 딱 떨어져야 하는 짧은 칼럼이라 쓰기 어려우실 것 같아요.
725자를 맞춰야 해서, 글 쓰는 시간보다 글자수를 맞추는 데에 시간이 더 걸려요. 이 칼럼은 아주 작은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구상하고 시작했어요. 생활과 밀접한 이야기, 아주 당연하게 여겨오던 이야기를 적되 뒤통수가 켕기는 이야기를 챙겨보고 싶었어요. 제 의견을 보태는 건 최대한 절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나한테 이런 일이 있었는데, 별 것 아닌 일이긴 한데, 어딘가 이상하다 싶은 것들을 보여주기만 하려 해요. 그게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지를 신문 독자가 생각할 수 있게 이야기를 남겨두고 싶어요.
최근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에 필자로도 참여하셨어요. ‘연애’를 주제로 한 에세이인데 재밌게 읽었습니다.
서평가 금정연 씨가 제안을 해줘서 쓰게 됐는데, 재밌는 기획이라고 생각했어요. 흔쾌히 썼어요.
출판계의 불황은 차치하더라도 시집은 다른 분야에 비해 소외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몇 권의 시집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화제가 됐어요. 생각보다 많이 팔리고 있는 책이 ‘시집’이라는 기사도 보았는데요.
출판계와 독자들이 시를 너무 소외시키고 있다는 의견은 1990년대부터 쭉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때부터 지금껏 “그렇지 않을 거야”라고 주장하는 쪽이에요. 우리나라에선 시집은 너무 많이 출판되고 있고 시인도 너무 많아요. 그 많은 시인의 그 많은 시집들의 총량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닐 거예요.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누구의 어느 시집에 편중되지도 않고요. 다양성 같은 게 살아 있는 편이어서 제법 건강한 생태계라 생각해왔어요. 집중적으로 어느 시인의 시집이 많이 팔리는 현상 자체가 부재했기 때문에 ‘안 팔리네, 소외됐네’ 그런 이야기가 나왔던 게 아닐까요. 지금은 출판 불황이라잖아요. 늘 그만큼 팔렸고 지금도 그만큼 팔리고 있는 것인데, 다른 출판물들이 워낙 소비되지 않으니까 시집이 상대적으로 팔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그런데 만약에 시집이 정말로 부쩍 잘 팔리는 것이라면, 혹은 그만큼 시가 발전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 시대의 나쁜 징후를 반영한 거 아닐까요. 억압이 심한 나라에서 언제나 위대한 시가 탄생해왔듯이요.
시인은 소설가와는 또 다른 정체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시인으로부터 “낯선 자리에서 시인이라고 소개 받을 때의 당혹스러움’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데요. 작가님의 경우는 어떠신가요?
어디를 가더라도 웬만하면 시인이라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아요. 머리가 짧다 보니까 한 달에 한 번 정도 미용실에 가는데, 머리를 잘라주시는 분이 직업을 물어보실 때가 많아요. 사람마다의 헤어 스타일을 추구하기 위해서죠. 옛날에는 순진하게 문학을 한다고 답했더니, 지나치게 위엄 있게 잘라주더라고요. (웃음) 그 다음부터는 발레리나라고 하기도 하고 포토그래퍼라고도 말해요. 여행을 가서 게스트하우스 같은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도 시를 쓴다고는 말하지 않아요. 거짓말을 많이 하고 다녔죠. 제가 시인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조금씩 느껴지는 것은, 괴짜 취급을 한다는 거예요. 저는 이 괴짜 취급이 편한 면도 있어요. 시인으로 20년 넘게 살아오면서 시 쓴답시고 주변사람들에게 허용 받은 게 되게 많았던 것 같거든요. 그들이 관용을 좀더 열어둔 채 저를 대해주었지 않았나 생각해요. 어떤 룰을 안 지키고 조금 제멋대로여도, 자연스레 안착되지 못하고 다소 이상하게 굴어도, ‘시인이니까’하고 받아들여줄 때가 있었어요. 그런 종류의 혜택을 많이 누리며 살았다고 생각해요.
불편함이 더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요.
부모님은 늘 저를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앞으로 뭘 하며 살아갈지 아직도 궁금해 하세요. 저는 여태껏처럼 제가 바라는 시를 계속 쓰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도 입시 준비생, 취업 준비생을 대하듯이 ‘우리 딸이 언젠가 뭔가는 하겠지’하고 기다리세요. (웃음)
1993년에 등단하셨으니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간 시를 대하는 태도와 마음에도 변화가 있었을 텐데요.
내 얘기로 시작하여 내 얘기가 아닌 것들로 흘러가고 있어요. 내가 누구인지 점점 더 잊어가고 있어요. 자아 자체를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고요. 텅 빈 인간이 되고 싶어요. 투명해지는 인간. 물을 닮은 액체 같은 인간. 이 세상에 내가 만나는 접촉면들에 어떤 식으로든 물들고, 더 그 접촉면을 젖게 만들고 싶어요. 내가 감응하고 변할 때마다 내가 쓰는 시가 변했으면 해요. 물론 이 세상도 변했으면 해요. 처음 시를 쓸 때는 제가 쓰는 언어를 잘 다루고 싶었다면, 지금은 언어 자체에게 자리를 더 많이 내어주려고 하는 것 같고요.
평생 시를 쓰고 살면 어떻게 될까요? 미래에 어떤 시인이 되어 있을까요?
맨 처음 시를 쓰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이걸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인가?’ 이런 계산은 아예 안 했어요. 헤아림 자체를 아예 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어요. 5년 정도 시를 쓰다가 시집 한 권이 나오면 요절할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지금도 미래에 대한 생각은 안 해요. 할 겨를이 없기도 하고요. 다른 직업을 가진 고등학교 동창생을 만나면, “나이가 60세가 되면 뭘 하고 살 거다” 같은 이야기를 벌써부터 해요. “너는?”하고 나를 쳐다봐요. (웃음) 그런데 나는 그런 생각이 불필요해 보여요. 지금 당장 내가 감응한 것들을 시에 어떻게 쓸지, 그런 생각들을 하느라 정신을 못 차리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주변에서 나를 위태롭게 생각한다는 게 느껴져요. 우리가 미래에 뭘 하겠다는 그림을 근사하게 그린다고 해서 그것에 가 닿을 수 있을까? 어쩌면 가 닿을 수도 있을 거예요. 아마도 형식적으로는요. 그 내용까지 꿈꾸던 것일 리는 없어요. 미리 절망하고 있는 편이기도 한데요. 미래에 대한 그림 자체를 그리지 않아요. 미래라는 시간을 생각해야 할 사람은 그 미래라는 시간을 살아갈 미래의 나예요. 지금의 나는 아니에요. 오늘만 내가 쓰고 싶은 시를 쓸 수 있다면 그게 다예요.
언젠가 시에 대해 ‘비밀을 받아주는 장소’라고 표현하신 적이 있어요.
한 문예지에서 ‘내 시의 비밀’이라는 열쇳말로 시인들이 시론을 연재했어요. “나의 시에는 비밀이 없는데, 왜냐면 내 시가 내 비밀을 다 받아주는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썼어요. 현실에서 차마 말하지 못한 것들, 말이 되지 않는 것들, 대화에서 누락된 것들, 말하면 안 되는 것들을 시에다 말한다고 썼어요. 말해도 되나 싶은 것들을 시에다 제대로 적어두고 싶어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선연하게 보여주고 싶어요. 시인은 시 속에서 얼마든지 아슬아슬할 수 있는 존재예요. 그 순간이 가장 특별한 순간이에요. 마음껏 아슬아슬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것 같아요.
최근 SNS에서 시를 표방한 짧은 글이 많이 소비되면서, 인기를 얻은 작가들이 많습니다. 단행본으로도 출간됐고 반응도 썩 좋습니다. 시인은 이 같은 현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큰 관심은 없어요. 하지만 어떤 시인이 “그것도 시야? 대중적으로 너무 소비되는 시는 시가 아니야”라고 비판적으로만 본다면 “시인이 쓰는 것만 꼭 시라고 할 수 있나?”라고 반문해보고 싶긴 해요. 사실 노래라는 것도 아무나 불러도 되죠. 부르고 싶다면 마음껏 불러도 되죠. 시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당황스럽고 부끄럽고 이상해요
문학과지성 437번째 시인선 『수학자의 아침』은 2013년 11월에 출간됐어요. 딱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요. 작가의 말에 남긴 “애도를 멎게 하는 자장가가 되고 싶다”는 글이 기억에 남습니다. 49편의 시를 쓰면서 가졌던 마음이실 텐데요. 이 문장을 썼을 때의 심정은 어땠나요?
그 시집은 유난히 다양한 타자들이 등장해요. 제가 만났던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이 나에게 끼친 영향들을 시로 쓰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유독 귀가 기울여지고 시로 쓰고 싶은 이야기들은 신음이거나 절규, 비명이거나 기도 같은 것과 유사한 데가 있었어요. 횡설수설과 울먹임 사이에 존재하는 말들이었는데, 시집 원고를 정리하면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어요. 소용이 없어서 다행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지상의 모든 지친 말들이 잠시 멈추고 잠시 휘발되는 자리에 이 시집이 조용히 놓여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자장가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 같아요.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시를 외우고, 누군가에게 적어서 선물로 주곤 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옛날 시들은 저절로 외워졌어요. 시의 문장에 박자가 딱딱 맞았으니까요. 지금의 시들은 랩 같아요. 외울 이유도 없고 외워지지도 않겠죠. 선물용이라기보다는 흉기에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하고요. 작년 이맘때 아기를 낳은 지인으로부터 축하 선물로 시집을 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고르다 고르다 결국 다른 책을 줬어요.
“아무도 내게 시를 써보라고 권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를 썼다”고 말하신 적이 있어요. 누가 쓰라고 했으면 시를 안 썼을까요?
안 썼을 것 같아요. (웃음) 어렸을 때에 글쓰기에 재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재주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느껴볼 만한 기회도 별로 없었어요. 제가 어릴 때 자주 들었던 이야기는 “피아노를 한 번 해봐라, 키가 크니까 운동선수를 해봐라” 같은 권유들이었어요. 아무도 시인이 되라고 한 적은 없었어요. 시인이 어떤 삶을 사는 길인지 관심조차 없었어요. 그래서 저에겐 가장 식상하지 않은 세계였을지도 모르겠어요. 너무 하고 싶은 것도 누가 시켜서 의무가 되고 나면 갑자기 하기가 싫어지잖아요. 신바람이 식어버리죠.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표현한 말이었어요.
평소 시인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내가 쓴 시를 생각지도 못했던 낯선 공간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될 때,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늘 당황해요. 언젠가 지하철역에 제 시가 붙어있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시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어릴 때 친구가 “네 시가 여기 붙어 있다”면서 논현역인가에 게재된 내 시를 사진으로 찍어서 메시지로 보내줬어요. 당황했어요. 작년에는 세월호로 인해 숨진 단원고 박예슬 학생을 위해 마련된 전시를 보러 서촌 갤러리에 간 적이 있는데요. 시 한 편이 프린트돼서 작품 아래에 붙어 있었어요. 관람객 중 누가 붙여놓고 간 듯했는데, ‘시가 있네’하고 보고 있다가, 내 시라서 깜짝 놀랐어요. 당황스럽고 이상하고 부끄러웠어요. 내가 쓴 시가 맞지만 내가 쓴 적 없는 시를 보는 것 같았어요.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잔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박예슬 전시회'에 누군가가 붙여둔 시, 김소연의 시집 『수학자의 아침』에 실린 「그래서」)
시 쓰고 싶다는 사람, 안 말릴 것 같아요
“시를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만, 시를 읽고서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네’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다. 다소 과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처절함이랄까요? 시인의 목숨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시는 거짓말로 쓸 수 없으니까요.
사람들은 영혼을 장롱 속에 처박아 놓고 살아요. 눈에 보이는 너무 많은 것들을 돌보느라 정신 없이 살아가요. 누구나 눈에 보이는 성과를 획득하고 싶어하고 눈에 보이는 성공을 욕망해요. 그러나 그런 것들을 거의 다 포기하고 영혼 하나 건사하고 사는 사람인 것 같아요. 시를 읽는다는 것은 영혼이 말하는 걸 영혼으로만 들어야 하는 작업에 가깝죠. 그래서 다는 몰라도 뭔가를 전달받겠죠.
시를 배우고 싶어하는 분들의 공통점이 있을까요?
20대 젊은 친구들을 보면, 영혼이 너무 반짝 반짝해서, 시가 아니면 이 사람을 이 세상에서 살게 할 힘이 없을 것 같을 때가 있어요. 30, 40대 분들은 대개 아주 훌륭하게 살았는데, 영혼을 너무 돌보지 않아서 그 영혼을 장롱에서 꺼내지 않으면 더 이상 못 살 것 같아서 찾아오신 것 같고요.
부모님께서는 아직도 ‘내 딸이 언젠가 뭔가를 하겠지’라고 기대하고 계신다고 하셨잖아요. 만약 정말 아끼는 누군가가 시인이 되고 싶다고 하면, 말리실 건가요?
안 말릴 것 같아요. 환영할 수 있어요.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등이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요. 나는 시인인데 산문집이 더 인기가 있을 때, 속상하거나 서운한 마음은 없나요? 소설가들도 유독 에세이가 더 잘 팔리고 사랑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요.
소설가 같은 경우는 둘 다 산문이니까 뭐가 더 사랑을 받고 상업적으로 반응이 있을 때, 소설과 산문이 비교 대상이 될 수는 있겠어요. 그렇지만 저는 시와 산문이니, 경우가 좀 다르겠죠. 내 산문집을 좋아해주는 독자들은 대부분 내 시집도 읽고 산문집도 읽은 게 아니라, 산문집만 읽은 경우예요. “둘 다 읽었는데, 시집은 후진데 산문집은 좋더라”라고 여길 리가 없어요. 그럴 리는 없어요. (웃음)
대중적으로 많이 읽히는 시와 시인에게 더 각별한 시, 이 둘 사이의 거리도 존재하겠지요?
독자들이 어느 시를 좋아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고, 시인이 자신의 시 중에 어느 시를 각별해하는 것도 시인의 몫이죠.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는 사람들의 것이 되는 것 같아요. 변형되는 것 같아요. 빛이 바랠 수도 있고 설탕이 묻어날 수도 있고 부풀려질 수도 있고 만만한 무언가로 훼손될 수도 있고요. 닳고 삭아가겠죠.
김소연 시인의 새 시집은 언제 나오나요?
아직 계획이 전혀 없어요. 발표한 시는 30편쯤 되고요. 독립출판물의 형태로 조금 이상하고 소박한 시집을 가볍게 내보고 싶어요.
수학자의 아침 김소연 저 | 문학과지성사
1993년 등단한 후 지금까지, 세 권의 시집을 통해 서늘한 중에 애틋함을 읽어내고 적막의 가운데에서 빛을 밝히며 시적 미학을 탐구해온 시인 김소연이 네번째 시집 『수학자의 아침』을 출간했다. 시인은 묻는다. “깊은 밤이란 말은 있는데 왜 깊은 아침이란 말은 없는 걸까”.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조금 “낯선 사람이 되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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