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 일에 열정을 쏟아 붓던 사람이 극도의 피로감과 무기력감을 겪게 되는 현상이다.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의 저자인 김진세 정신과 전문의도 2년 전, 번아웃 증후군을 겪었다. ‘글쓰는 정신과의사’로 유명한 그에게 상담실과 서재가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환자에게 짜증을 내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버킷리스트에 적어두었던 오랜 꿈을 발견한 저자는 망설임 없이 떠남을 계획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아.
30일 동안 800여 킬로미터를 걷는 고난에 가까운 여정이었다. ‘위태로운 정신과의사의 행복한 산티아고 피신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처음에는 “떠나서 일단 피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나선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삶에 대한 질문이 되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떠나온 이들이었지만 그들의 고민은 다르지 않았다. 그 안에서 저자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문제들과 우리가 바라는 삶의 모습을 발견했다.
현재 고려제일정신건강의학과의원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있는 김진세 저자는 『심리학 초콜릿』, 『행복을 인터뷰하다』, 『태도의 힘』등의 저서로도 친숙한 인물이다. 〈레이디경향〉, 〈빅이슈〉, <포커스> 등 다수의 매거진에 칼럼을 연재하며 심리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사기 당한 기분이 들었어요
번아웃 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걸 알게 되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정말 암담했죠.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세상에, 그럴 수가 있어?’라는 느낌이 들게 되죠. 물론 정신과 의사도 사람이니까 당연히 번아웃이 될 수 있고, 그런 상황에서는 환자에게 짜증도 낼 수 있다고 생각은 해요. 그렇지만 스스로에 대한 기대 같은 게 있잖아요. 직업적인 윤리라든지 의사로서 지켜야 될 부분에서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드니까 굉장히 힘들더라고요.
정신과 의사만큼 감정 소모가 심한 직업도 없을 것 같아요.
그렇죠. 감정 노동의 최고봉이죠.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감정이 전염되잖아요. 점점 힘들다가 끝날 때쯤 되면 녹초가 돼요. 상담을 여러 건 하고 다음 날 아침이 되면 1~2kg 정도 빠지기도 하고요. 환자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수백만 가지 상황을 설정하고, 그 가운데에서 좋은 걸 골라내야 하니까 힘들죠. 그리고 잘 아시다시피 의사는 친절해야 되잖아요. 사회적인 책임을 강요 받는 직업이죠.
직업적 특성상 누군가에게 상담을 받기도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외과 의사라면 정신과 의사를 찾아오겠지만요(웃음).
맞아요, 의사 선생님들도 와서 진료를 받으세요. 저희 같은 경우는 계속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스스로 정신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에요. 저도 될 수 있으면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이틀이나 삼일에 한 번 정도는 꼭 운동을 해요. 주말이면 산과 들로 돌아다니고, 좋은 친구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하죠. 책을 보고 음악을 듣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감정 노동이 심하니까,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는 어렵죠.
버킷리스트에서 ‘산티아고 길 순례’를 발견하셨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일단 여기로 피하고 보자’는 거였나요?
그렇죠. 사실은 4주 이상 병원을 비운다는 게 쉽지 않아요. 첫 번째로 환자들한테 미안한 일이고, 그 다음에 경제적으로도 문제가 생기고, 여러 가지 걸리는 것들이 많거든요. 기존의 스케줄도 다 미뤄야 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살고 봐야 하니까, 말 그대로 피신하기 위해서 움직인 거죠. 그런데 정말 재밌는 건 ‘가야지’ 하고 결심하는 순간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는 거예요. 가려고 마음먹는 순간 그 기운과 여유가 함께 밀려오니까 기분이 되게 좋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휴가에서 돌아오는 날부터 다음 휴가를 계획해요. 늘 머릿속에 ‘놀러 가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2년 동안 준비하신 끝에 떠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생각하자마자 떠날 수 있으면 멋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저는 충동적이지 못하니까 그럴 수는 없고, 그래서 차분히 계획을 세운 거죠. 제일 중요한 건 체력이거든요. 일주일에 한 번씩 걷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매일 걷는 게 문제예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블로그, 카페를 찾아 다니면서 정보를 모아보니까 여러 번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해서 체력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두 번째는 현지 날씨 정보 같은 다양한 정보를 찾아야 했고요, 세 번째는 비용이었어요. 저는 10만 원씩 2년 동안 적금을 들었는데, 그 정도 금액이면 충분히 갔다 올 수 있어요. 적금을 들면 더 행복하게 여비를 마련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꿈에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기쁘거든요.
많은 분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에 환상을 가지고 계실 것 같아요. 작가님께서 “걷다 보면 나 스스로에게 집중할 시간이 많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셨던 것처럼요. 그런데 책을 읽어 보니, 현실은 조금 달랐던 것 같아요(웃음).
처음에는 사기 당한 기분이 들면서 ‘누군가에게는 멋있고 철학적인 길이지만 나에게는 고난의 길이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다 걷고 나서 마지막 순간에도 무지 힘들었던 일들이 기억 속에 다 남아있거든요. 아마 제가 마음에 대한 전문가이기 때문에 생각이 났을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잊어버리죠. 마지막에 오는 감정이 되게 중요해요. 그 감정 때문에 힘들었던 감정을 잊어버리거든요. 산티아고에 다녀온 사람들도 다 고생을 했지만 마지막 순간의 감격스러운 기분 때문에 다 잊어버린 거죠. 제가 직접 걸어보니까, 실은 만만치 않은 일이고요. 두 벌의 옷을 가지고 한 달을 버틴다는 게 그렇게 멋진 일이 아니에요, 절대로. 먹는 것도 그렇죠. 블로그 같은 데 올라온 사진을 보면 너무 맛있는 음식처럼 보이잖아요. 그 사진만 봤을 때는 산티아고에 가면 정말 산해진미를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대개는 바게트 빵에 치즈를 넣는 날과 하몽을 넣는 날이 있고 기분 좋은 날은 치즈와 하몽을 같이 넣어 먹죠(웃음). 그런 날이 대부분이에요.
책에서 “감정적인 기억의 왜곡”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이 기억나네요. “진짜 세상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추억은 선택적 기억 상실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니까”라고 하셨는데, 위안이 되는 이야기였어요.
사실은 지금 우리가 되게 힘들잖아요. 그런데 행복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무덤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이 삶이 행복하게 느껴질 수 있는 거거든요. 물론 현실주의자들은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루하루가 행복해야지’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래도 행복했네’ 하고 죽는 것과 ‘거지 같이 살다가 죽네’ 하고 생각하는 것은 다를 거라는 거예요. 죽는 그 순간만이라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감정을 가지고 생을 마감할 수 있으면 인생은 그리 실패한 것이 아니죠.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정말로 고민하는 것은 돈이나 성취 때문이 아니거든요. 가능하면 행복한 삶을 지향하는 것이, 살면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해도, 결국엔 ‘아, 잘 왔네’ 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속으면 안 되기는 하죠.
현실이 생각했던 모습과 달랐지만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으셨던 것 같아요. 오히려 “선택이 아닌 흐름에 맡겨보자”, “이 길에서만은 억지로 살지 말자”고 생각을 바꾸셨잖아요. 그것만으로도 길에서 얻으실 것은 다 얻으신 게 아닌가 싶어요.
길뿐만 아니라 걸을 때도 마찬가지거든요. 물집이 잡혀 본 적이 없는 발에 물집이 잡혔으니 걷는 게 더 불편해질 거고, 걷는 게 불편하면 절뚝거리면서 걷는 게 당연한 거죠.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이 경험하는 잘못 중에 하나가 생기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걱정하는 거예요. 그 걱정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거거든요. 두 번째는 생기면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한 걱정이에요. 걱정해 봤자 아무 소용없는 일들이 있잖아요. 인생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바탕 위에서 미리 걱정하지 말고,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길도 마찬가지예요. 멈출 수 없는 건 내가 애를 쓴다고 해도 안 되거든요. 그러려면 충분한 여유가 있어야 돼요. 여유가 없으면 그렇게 마음을 돌려먹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느려도 내 페이스 대로 걷는 게 현명한 거예요
길 위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담겨있습니다. 각자 다른 이유로 찾아온 사람들이지만 그들 사이에도 공통점이 있을까요?
산티아고에 가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고 제가 내린 결론은, 그들의 고민과 우리들의 고민이 별다른 게 없다는 거예요. 다 공통 관심사더라고요. 성취, 성공, 실패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연애, 이별,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어요. ‘내일 아침에 뭘 먹을까’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요(웃음).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또 한 가지는 산티아고라는 공통의 목표가 있다는 거죠. 모두가 고민을 가지고 있고 진지하게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조금 더 마음을 쉽게 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공통점으로 인해서 응집력 같은 게 생기기도 하고요. 그리고 같은 목표가 있으니까 공감이 쉽게 되잖아요. 필요한 게 있으면 잘 빌려주기도 하고, 같이 아파해주고, 심지어 돌봐주기도 해요. 늘 도움이 충분한 그런 느낌이 좋았어요. 아마도 외로운 분들은 산티아고에 가시면 직접적인 위로와 위안을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그곳을 못 떠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것 같고, 늘 그 꿈에 사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정신과 의사이시니까, 그 분들의 고민을 허투루 들으실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관심이 되게 많아요. 그래서 정신과 의사가 되려고 했던 거고요. 제가 직업을 감추려고 해도, 아마 그런 부분이 드러났던 것 같아요. 정신과 치료라는 게 약물 치료도 있고 상담 치료도 있지만 어쨌든 만남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거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그 분들이 조금 편안하게 느끼셨던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그 분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깊게 듣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기도 했는데, 저도 모르게 몸에 밴 직업적인 특성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결국 우리가 고민하는 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나’,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나’가 아닐까 싶더라고요.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건 삶의 다양성인 것 같아요. 그 다양함 속에서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걸 하는 게 가장 행복한 거겠죠. 우리가 흔히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과 잘하는 일을 하는 것 중에 어떤 게 중요하냐고요. 그런데 그것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해야 되는 것도 있고 하지 말아야 되는 것도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에 의해 해야 되는 일도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다른 일을 더 잘하기 때문에 성취를 위해서 그 일을 선택할 수도 있죠.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 다양한 삶에 내가 얼마나 만족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할 것 같은데, 다들 그런 고민들을 하고 살더라고요. 특히 젊은 친구들의 경우에는 타인과 자기 삶을 비교하고, 그것 때문에 실의에 빠지기도 하고, 하지만 결국에는 내 삶이 더 옳다고 판단해서 스스로 더 만족을 얻고, 이런 모습들을 봤어요.
길 위에서 만난 이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마이클이라는 호주 할아버지예요. 어느덧 제가 노년의 삶에 대해 생각할 나이가 됐더라고요. 왠지 모르게 노년이라고 하면 노년의 삶은 병원과 보험이 떠오르는데, 마이클 할아버지는 도전과 용기가 떠오르게 해주셨어요. 그래서 너무 감사하고요. 떠오르는 사람들은 정말 많죠. 질리언이라는 친구는 우리 삶이라는 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확신이 없으면 아무리 잘 살아도 마음이 허전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줬어요. 세르게이나 파블로도 기억이 나는데요. 어쨌든 모든 사람들이 절망, 후회, 고통 같은 부정적인 질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길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답을 바꿔주는 것 같더라고요.
걸음이 느린 소녀 ‘루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많이 놀랐어요. “느린 만큼 더 오래 걸어요!”라는 말이 울림을 주더라고요. “조금 앞서거나 조금 뒤처질 수 있지만, 자신의 페이스만 유지하면 결코 실패할 인생은 없다”는 작가님의 말씀도 뭉클하고요.
잘못 이해하면 ‘성공하려면 능력이 부족해도 잠 줄여가면서 매일 일해야 된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는데,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내가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걷다 보면 앞에 가는 사람을 앞질러 가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을 앞질러서 한 시간 이상 걷다가 쉬면, 내가 앞질렀던 사람이 10분 내에 도착해요. 인간이 걸을 수 있는 속도가 있잖아요. 보통 1시간에 4km 정도를 걷는데 빨리 걸으면 6km 정도거든요. 15분 정도면 따라잡는 거예요. 그러면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정말 잠 안 자고 애써서 가는 사람들이 실은 조금 더 앞서갈 뿐이에요. 그래서 길게 놓고 보자면 그냥 내 페이스 대로 가는 게 나은 거죠.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살다가 번아웃에 빠져서 나가떨어지기도 할 거고, 스트레스가 많아서 우울증이나 암에 걸릴 수도 있겠죠. 내 페이스를 지킬 수 있으면 그게 인생을 사는 데 더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산티아고 순례길이 남긴 건 ‘여유’
책을 읽으면서 완주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하게 되더라고요. ‘완주를 해야만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어요. 작가님께서는 “우리는 완주를 택하지만 다음 세대들은 즐거움을 선택하기 바란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저희 세대에게는 불안이 있어요. 성공에 대한 집착도 많고 자존심도 강해요. 아버지 세대로부터 물려받는 거예요. 약간 유교적인 측면도 있고, 드러나는 겉모습에 대한 집착도 있죠. 만약 제가 여유가 있었으면, 20대 초반이나 30대였다면 피레네를 넘었을 거예요. 실패하면 다시 오면 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그랬다면 아마 중간에 무릎이 아팠을 때, 어쩌면 물집이 잡혔을 때부터 ‘에이, 놀다가자’ 하고 돌아갔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제 아들은 그랬으면 좋겠어요. 조금 더 여유 있게 ‘다음에 또 오면 되지’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사회로 확대시켜 보면, 저는 이 사회에 태어난 사람들은 이 사회가 먹여 살릴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의무가 모든 사람들한테 받아들여져야 출산율이 늘겠죠. 그런데 그 의무를 안 지려고 하거든요. 다 개개인의 문제로 돌려버리잖아요. 그러지 말자는 거죠. 제 다음 세대에서는 완주가 개인의 목표가 아닌 사회 전체의 목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 길을 걷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자유로움’이다”라고 하셨어요. 그 길 위에서 작가님은 얼마나 자유로웠던 것 같으세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건, 일단 싱글이었죠(웃음). 게다가 입는 옷 두 벌, 가방 하나 밖에 없으니까 물질적으로도 완전히 자유로워졌죠. 거기에서는 모두가 그렇기 때문에 그게 가난한 게 아니에요. 만약 제가 서울에서 옷 두 벌이랑 배낭 하나랑 등산화 하나만 가졌다면 엄청 가난한 거잖아요. 하지만 그 안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고 너무 자유스럽죠. 욕심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거예요. 우울증이나 불안증 같은 증상들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이에요. 그러니까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그런 것들이 없어져야 되고, 거꾸로 자유로워지면 그런 게 당연히 없어질 거예요. 제가 옷을 두 벌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옷 한 벌 밖에 없는 사람을 욕하지도 않고 세 벌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지도 않을 수 있는 건, 제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게 가장 중요해요. 그런 면에서는 길에서처럼 자유로울 때는 없었죠.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으세요?
살면서 한 번쯤은 당당하게, 자유로운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봐야 돼요. 그러려면 자유롭게 자신을 볼 수 있는 어떤 상황을 만들어가야 되는데, 그 상황이라는 게 사람마다 달라요. 동굴에 들어가서 바위를 보면서 얻는 분도 계시고, 현미경 속에서 발견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죠. 그런데 대부분은 저처럼 길에서 발견할 것 같아요. 그러려면 충분한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지만 그게 꼭 산티아고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어디든 좋으니까 자신을 바라보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되는 거죠. 그래도 꼭 가야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충분한 계획이 필요할 것 같아요. 정밀한 계획은 아니고요. 자기에 대해서 잘 파악을 하고 나면 조금 더 자세하게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거예요. 와인, 스페인의 역사, 건물처럼 관심사에 따라 목적의식을 가지고 떠나도 재밌을 것 같고요. ‘나는 매번 계획을 세워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무계획으로 갈 거야’라고 생각해도 괜찮아요. 각자에게 맞는 즐거운 길을 선택하면 되는 거니까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후에 작가님께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요?
제일 큰 건 여유죠. 제가 처음 칼럼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정신과 환자들에 대한 차별, 편견 때문이었어요. 그걸 없애려면 많이 알려드려야 하잖아요. 그래서 쓰기 시작했고, 강연 요청이 들어와도 다른 일정을 다 정리하고 가야 했어요. 다녀오면 굉장히 뿌듯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선약이 있으면 못 간다고 말씀 드려요. 이제는 생각이 달라진 게 ‘내가 아니어도 정신과 의사들이 많고 나보다 훨씬 더 설명 잘하는 선생님들도 계신데 괜히 나를 괴롭히지 말자’고 생각해요. 그리고 환자들을 만나면서 책을 쓰려면 주말을 이용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동안 주말이라는 게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매주 산에 가서 걸어요. 그런 변화가 생겼어요. 여유가 생긴 거죠.
번아웃 증후군으로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있으시겠죠?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것은 병명은 없어요. 사회심리적인 현상인 거죠. 대개 세 가지 증상이 있는데, 하나는 정신적인 고통이 따르는 거예요. 우울하거나 짜증이 많이 나는 문제가 생기죠. 그 다음에 행동에도 변화가 생기는데요. 지각을 한다든지 술을 많이 마신다든지 이런 문제가 생겨요. 그리고 생각에도 문제가 생겨서 스스로를 비하하기도 하죠. 모든 병은 예방이 제일 중요해요. 번아웃 증후군을 예방하려면 일단은 자기 자신을 놓치면 안 돼요. 항상 내가 중심이 돼야 하고, 시간에 쫓기는 게 아니라 시간을 지배해야 돼요. 만약 자신의 능력으로 100개를 할 수 있다면, 100개가 아닌 90개만 해야 돼요. 그러면 번아웃이 되지 않아요. 그런데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늘 120개를 하려고 해요. 이렇게 말하면 ‘일이 너무 많은데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말씀하실 수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면 이미 번아웃 상황인 거예요. 자신이 모를 뿐이죠.
이미 번아웃 증후군을 앓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인정을 해야 돼요. 내가 나를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일에 쫓기고 있다면 그건 번아웃된 거예요. 그런 분들은 아침에 잠에서 깨면 벌떡 일어나서 돌아다니지 마시고, 5~10분 정도 스트레칭을 하세요. 명상을 하셔도 좋아요. 이완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주변 사람들한테 자꾸 이야기해야 돼요. 힘들다고요. 그걸 창피해할 필요 없어요. 세 번째는 필요하다면 도움을 받아야 돼요. 약을 먹는 방법도 있겠죠. 번아웃의 근원은 스트레스거든요.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약을 복용할 수도 있고요. 그리고 저처럼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그 순간에 번아웃이 많이 줄어들어요.
책을 읽고 작가님을 부러워하실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한 달 동안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요.
4주를 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런데 제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나서 든 생각은,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거예요. 주어진 휴가 동안만이라도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으면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말씀 드렸다시피 평생에 한 번 정도는 나를 마주해야 되는데,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변칙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시간을 일상에서 가지면서 자기를 마주할 준비를 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시간이 짧으면 정말 안 되더라고요. 처음에 산티아고에 가서 ‘나는 뭐지?’ 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안 떠오르더라고요.
중요한 건 ‘나를 마주보는 시간’을 갖는 거군요.
자신을 마주보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고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앓고 있는 정신적 질환들 대부분이 내 삶의 중심이 바깥에 있기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남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나는 없어지는 거거든요. 조금 괴팍하고 주류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비춰지더라도 그냥 그걸 유지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자기 삶이니까요. 남의 눈에 맞춰서 표준화하기 시작하면 내 삶은 없어지는 거거든요. 남의 삶을 사느니 해괴망측하더라도 내 삶을 사는 게 훨씬 낫죠.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김진세 저 | 이봄
이 책은 위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떠난 한 정신과의사의 산티아고 피신기이자, 그 길 위에서 얻은 귀중한 깨달음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