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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태 “아버지에게도 20대 시절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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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역사, 25권의 책으로 남다

고경태 기자에게 아버지는 스물다섯 권의 책으로 남았다. 34년이란 시간동안 아버지가 직접 신문 기사와 사설, 만평들을 가려내어 오려붙인 스크랩북이었다. 그 시간의 조각들 옆으로 아버지는 코멘트를 덧붙여놓았다. 때로는 탄식과 일갈이 담긴 시로써 대신했다. 그 고독한 작업들이 어떤 이유와 목적에서 시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미처 묻기도 전에 아버지는 곁을 떠났다. 그리고 2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이제 아들은 중년의 가장이 되어 아버지와 다시 마주 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물었다. 아버지의 스크랩 안에 담긴 것은 무엇입니까. 말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손때 묻은 스물다섯 권의 책이 대답한다. 자신이 품고 있는 역사를 드러내 보인다. 그것은 지나간 시절 한국의 역사인 동시에 아버지의 역사였다.

『대한국민 현대사』를 내며 역사를 발견하는 것 이상으로 아버지를 발견했다. 스크랩에 적힌 볼펜 글씨의 기록을 통해, 20대 중반의 청춘에서 50대 후반으로 늙어갈 때까지 세상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 변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광경은 경이로웠다. 내가 역사다! 나의 아버지가 역사다! 아버지라는 프리즘으로 본 한국 현대사는 훨씬 입체적이었다. (p.7)
고경태 기자가 아버지의 스크랩 안에서 발견한 것은 ‘평범한 시민의 눈으로 바라본 현대사’였다. 역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이 일상으로 기록되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들을 목격한 것이다. “최소 단위인 ‘나’의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시작할 때 역사는 우리의 살갗을 스치며 풍만하게 다가온다고 믿는” 그에게 이것은 곧 새로운 역사의 발견이었다. 너무나 익숙하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낯선,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역사의 기록을 마주한 것이었다. 그는 이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어 놓기로 결심한다. ‘고경태의 아버지의 스크랩’이라는 이름으로 2011년부터 <채널예스>에 칼럼을 연재하고 그를 바탕으로 『대한국민 현대사』를 펴냈다. 고경태 기자에게 『대한국민 현대사』의 출간은 오래전부터 꿈꿔온 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줄곧 ‘언젠가 아버지의 스크랩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다. 지금이 아니면 쓰지 못할지도 모른단 생각으로 그는 <채널예스>에 칼럼 연재를 제안했다. 그리고 54년 전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들은 아버지가 스크랩한 자료들을 토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흩어져 있는 사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아버지, 당신에게도 20대 시절이 존재했군요

“‘내가 역사다, 모든 것이 역사다’라는 생각에서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출발했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가 역사의 주체로 선다는 건, 생활 속에서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거든요. 거대한 큰 줄기의 역사가 아니라 작은 줄기의 역사들을 같이 관찰하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사회 정치적인 것에만 역사가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에도 역사가 있어요. 우리가 의미를 두지 않았던 역사들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면, 그 안에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죠. 몰랐던 것들도 알게 되고요.”

아버지의 역사 안에도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은 무수하게 많았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아버지의 스크랩북은 비밀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고경태 기자의 아버지는 일제 식민통치 시대와 한국전쟁, 독재정권 시절 속에서 평생을 살았다. 한국 정치사의 격변기,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을 아버지는 어떻게 걸어왔을까.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청년은 아버지가 되었을까. 스크랩북 제1권이 시작된 1959년, 아버지의 나이는 만 스물넷이었다. 마흔여섯의 아들이 바라본 스물넷 청년 시절의 아버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언제나 말이 없이 무뚝뚝하기만 했던 기억 속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새로운 역사의 발견이 시작된 것이다.

“아버지는 항상 기성세대로만 존재하잖아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어른이었고,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죠. 그런데 스크랩북을 보니까 아버지에게도 어린 시절의 치기와 유치함, 이런 것들이 있었더라고요. 지금 내가 아주 어린 아이들을 볼 때 느끼는 감정들을 아버지에게서 느끼게 된 거죠. 그런 게 가장 새로운 발견이라고 할 수 있어요.”

새롭게 드러난 아버지의 역사는 계속 이어졌다. 스크랩북을 펼쳐보기 전에는 자신의 아버지가 이토록 정치와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단 한 차례도 아들들과 정치적 논제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없던 아버지셨다. 그런 아버지가 스크랩북 안에서는 4.19 혁명 이후 넘쳐난 데모대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고, 1971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는 ‘맞수’라는 제목의 시를 적어 정세를 논한다. 권력을 움켜쥔 자들의 부조리와 위협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가 하면,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두고 ‘무조건 대답하지 말라’로 끝을 맺는 시를 남겼다. 아버지의 감추어져 있던 면모를 발견한 아들은 “당신에게도 정치적 관심으로 피가 뜨겁던 20대 시절이 존재했음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생전 이미지와 영 어울리지 않는다.”(p.71)고 적었다.

“71년도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통해 당선됐을 때, 아버지가 스크랩하신 신문 기사를 봤어요. 기사에 실린 박정희 대통령 사진에 만평을 붙여놓으셨더라고요. 얼굴을 보기 싫다고 가리신 거죠. 그런 것들은 굉장히 재치도 있고 ‘아버지한테 이런 면이 있었구나’ 생각이 드는 새로운 발견이었죠.”


이것은 부자간의 한판 게임이다

하지만 고경태 기자가 아버지의 코멘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놀라움으로만 가득 차 있지도 않다. 그는 “이것은 부자간의 뒤늦은 대화다. 동시에 한판 게임이다. 나는 끊임없이 아버지에게 시비를 걸겠다”(p.16)고 선언한다.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아버지와 진보적 언론인 아들 사이의 뜨거운 토론이 시작된 것이다. 80년대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의 시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아버지를 향해 “에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애교어린 비아냥도 서슴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버지와 같이 그 시대를 살아온 세대들의 보수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이 정부가 선동하는 반공주의의 바람에 휩쓸린 것을 어찌 무지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인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두고 폭도들의 반란이라고 외치기만 하는 목소리들 속에서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었겠는가.

“4.19 혁명 이후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갑자기 군사독재 정권이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거부감이 있었을 거예요. 한 두 번은 그래도 좋게 봐줄 수 있는데 3선 개헌을 하면서 집권이 계속되니까 거부감이 깊어졌겠죠. 그런데 그런 정국이 계속 이어지니까 그냥 순응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이 세상이란 게 변하지 않는 것인데, 세상이 이런 거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하게 되었겠죠. 그걸 보수화라고 볼 수도 있을 거예요. 어쨌든 한국 사회에서 적응하고 살려면 반공 입장을 취해야 됐고, 공산주의 좌파와는 공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보면 보수화가 된 건 당연한 것 같기도 해요.”




시대의 아픔, 언론은 무엇을 했나

고경태 기자와 아버지 사이에는 쉽사리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그것은 역사적 경험의 차이 때문이기도 했지만, 보고 들은 정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입과 귀를 막고 눈을 가려버린 시대에서 아버지 세대가 ‘진실’이라고 알았던 것들이, 아들 세대에게는 ‘왜곡과 은폐’라는 이름으로 학습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비극과 혼란을 초래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 지난날 언론의 과오다. 그 사실을 아버지의 스크랩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 당시에 언론이 제대로 보도를 안 했고, 그렇기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알 수 없는 시대였죠. 지금은 진보와 보수가 싸우기는 해도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잖아요. 하지만 그때는 정보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신문밖에 없었어요. 물론 방송 뉴스도 있었지만 신문의 영향력이 더 강했던 시대였죠. 오로지 신문을 통해서만 정부와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을 터득하는 시대였는데, 그 때 신문이라는 게 언론 자유의 한계가 있었잖아요. 지금 보면 너무 당연한 사실들이지만 당시에는 뭐가 진실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거예요.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그렇고, 사북 사태도 마찬가지였고요.”

사북 사태는 1980년도에 탄광 노동자들이 신군부의 공권력과 정면충돌한 사건이다. 사건의 이면에는 탄광 노조 지부장이 불법 선거를 통해 당선된 사실과 함께, 그가 광업소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노동 환경을 열악하게 만든 사실이 감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당시 언론에서는 단순히 광부들이 임금 인상과 지부장 개선을 요구하며 난동을 피웠다고 보도되었다. 진실은 너무나 먼 곳에 있었던 시절이었음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와 유사한 사례들이 아버지의 스크랩 속에는 넘쳐났다. 20년 동안 언론인으로 일해 온 고경태 기자에게 그것들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시대의 아픔이었다. 그리고 뼈아픈 교훈이었다.

“그 당시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인권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대예요. 민주 인사들도 혹독한 고문을 당했지만, 그런 의식이 전혀 없는 그냥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 말도 못하는 대접을 받았어요. 누명 쓰고 가서 그냥 두들겨 맞고 감금당하고, 누구한테 하소연도 못하고 잡범 취급당하다가 요절하는 시대였던 거죠. 그런 일이 너무 비일비재했던 거예요. 박종철과 같은 민주 인사들이 고문당하고 90년대에 대학생들이 분신했던 것도 시대의 아픔이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들의 희생도 시대의 아픔으로 봐야 해요.”

『대한국민 현대사』의 후반부에서는 고경태 기자의 아버지가 스크랩한 사회면 기사들을 살펴볼 수 있다. 어쩌면 당시를 살았던 평범한 시민들에게 정치 뉴스보다 더 강렬하게 체감됐을, 평범한 시민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들이다. 동시에 그것은 너무나 아프고 슬픈 이야기다. 친구들의 놀림과 교사의 질책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장애인 학생부터 경찰의 가혹한 고문과 협박에 못 이겨 거짓 진술을 한 무고한 시민들까지, 아픈 시대를 살다 간 힘없는 자들의 기록이다. 당시의 신문들은 그들의 속내를 듣기보다 경찰이 발표한 수사 결과를 보도하는 데 급급했다. 심지어 범죄가 확정되지 않았는데도 피의자의 얼굴과 실명을 그대로 노출시키기도 했다.




60, 70년대 최고의 저널리스트는 ‘두꺼비’

분명 아버지의 스크랩, 그리고 『대한국민 현대사』에는 언론의 어두운 한 페이지가 담겨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언론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진실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권력의 날 선 감시 속에서도 한 마디 바른 소리를 전하는 모습은, 그들에게 돌아왔을 화살이 염려될 정도로 놀랍기까지 하다.

“예전에는 언론이 한국사에서 지사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죠. 권력에 대해서 진실을 밝혀야 된다는 사명감이 컸으니까요.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건’이 있던 시기에 아버지께서 스크랩하신 신문을 보면, 독자들의 격려 메시지로 채워진 광고란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먼 훗날 내 아들이 나에게 1975년도에 무엇을 했냐고 묻는다면 새마을 운동보다 자유언론 수호운동에 앞장섰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겠다”고 적어 보냈어요. 이런 걸 보면 독자들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져서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죠. ‘이런 간절한 마음의 응원을 받는 매체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정의에 목마르다는 것, 진실에 목마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죠. 진짜 감동적이에요. 지금 기자들 중에 과연 저런 응원과 지지를 받으면서 기사를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렇게 독자들이 응원하는 매체에서 일할 수 있다면 기자로서 정말 행복할 거예요. 우리는 그 뜨거운 시대를 견뎌냈던 분들을 존경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젊은 사람들이 기성세대가 나이 먹고 보수화된 것에 대해서 욕을 하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저런 선배들한테는 경의를 표해야죠.”

뜨거운 가슴으로 치열한 시대를 이겨내 온 그들은 언론에 드리운 어둠을 걷어내고 자유의 빛을 견인해 주었다. 서늘했던 시절에 스스로 하나의 불빛이 되기를 자처한 이들이었다. 고경태 기자는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언론인으로 만평 <두꺼비>를 그렸던 안의섭 화백을 꼽았다. 안의섭 화백은 1955년 경향신문의 <두꺼비>를 시작으로 40년 동안 시사만화가로서 날카로운 풍자가 담긴 만평을 그렸다. 어린 시절 고경태 기자는 그 안의 숨은 뜻을 읽어내지는 못했지만, <두꺼비>를 비롯해 <고바우 영감>과 같은 만평들을 보기 위해 아버지의 스크랩을 펼쳤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스크랩을 봤던 이유 중에 하나는 만화를 보기 위해서였어요. 정치 뉴스 같은 건 잘 모르니까 보지 않았고, 어린 애의 눈높이에 맞는 게 만화였던 거죠. 당시에 아버지께서 한국일보를 가장 많이 보셨는데 한국일보 만평은 <두꺼비>였어요. 그 때는 정치 사회적인 함의는 전혀 모르고 그냥 우스개로만 봤어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기사를 보고 그것과 연관된 만화를 보니까 ‘이 사람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 시절에 어떻게 이런 만화를 그렸을까’ 싶기도 하고요. 제가 생각할 때 안의섭 화백은 1960~1970년대 최고의 저널리스트였어요. 특히 안의섭 화백은 엄청난 독재정권의 억압과 압박에 시달렸잖아요. 86년에는 안기부 끌려가서 1년 7개월 동안 만평을 못 그린 적도 있었고, 70년대에 중정에도 많이 끌려갔고요. 그 살벌한 시절에도 정말 비판 수위가 높은 만화를 그렸고, 굉장히 직설적이고 풍자적이면서도 어떨 때는 슬프거든요. 그런 면에서 한국의 모든 기자를 다 포함해서 안의섭 화백이 최고의 저널리스트였다고 생각해요.”




34권 스크랩의 이유, 외로움

아버지와의 한판 게임을 위해 스크랩북을 펼쳤을 때부터 고경태 기자가 가장 궁금해 했던 것은 ‘아버지는 왜 스크랩을 했을까’하는 점이었다. 34년이란 긴 시간동안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과 성을 쏟으셨던 걸까. 스물다섯 권의 책 속에서 아버지의 지난 시간을 목격한 후, 그는 조심스레 짐작해 보았다. 아마도 외로움이 이유가 아니었을까.

“무척 외로우셨던 것 같아요. 스크랩도 외로움 때문에 하신 것 아닐까요. 자기 존재를 뭔가 더 증명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으니까 스크랩을 하신 것 같아요. 아버지가 스크랩에 남긴 것들을 보면 정치적 관심이 나름대로 있으셨던 것 같아요. 단지 표출 안 하셨을 뿐이죠. 그걸 스크랩에 표출하신 것 같아요. 만약 아버지께서 『대한국민 현대사』를 보시면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하다니’(웃음) 하고 좋아하실 것 같아요. 본인이 가장 아끼시던 물건으로 뭔가 작품을 만들었으니까요. 최고의 효도 상품이라고 하실 것 같아요.”

『대한국민 현대사』는 아버지가 짜 놓은 날실 위로 아들 고경태 기자가 씨실을 질러 넣어 만들어낸 역사 이야기다. 그것은 어떤 역사 교과서에서도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지 않는, 그리고 많은 이들이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역사의 조각들이다. 평범한 한 국민의 삶 속에 녹아든 그 이야기들은 우리가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역사의 구석구석을 비춰준다. 『대한국민 현대사』를 통해 고경태 기자가 아버지의 역사를 새롭게 발견했듯이, 독자들은 한국 현대사의 새로운 모습과 만나게 될 것이다. 고경태 기자는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고경태의 자서전 스쿨: 모든 인생은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를 강의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삶이 역사이듯, 누구나 책 한 권의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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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민 현대사고경태 저 | 푸른숲
아버지가 남긴 34년간의 신문 스크랩을 재료로 아들인 저자가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여 내놓은《대한국민 현대사》는 권세 잡은 이들만의 역사를 좇는 일반적인 역사서와는 전혀 다른 특별함이 깃들어 있다. 위세 등등하던 그들과 함께 그 시절을 살아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받아들인 일상에 관한 역사책이다. 이승만의 공과, 박정희의 18년간의 통치, 전두환과 민주화 시위 등등 현대사의 굵직한 단면들에서 당시 일상을 지배한 각종 재난과 사건사고까지 한 사람의 국민이 바라본 시선으로 역사를 담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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