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엽 예술감독의 신작 <개와 그림자>가 오는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난다. 2010년에 창단한 ‘국립현대무용단’ 초대예술감독으로 3년간 활동한 홍승엽 감독은 오는 7월 임기를 마친다. <개와 그림자>는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으로서 마지막으로 올리는 작품으로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에서 받은 영감을 이솝우화 ‘개와 그림자’로 연결했다. 공연 개막을 2주 앞두고 홍승엽 예술감독을 국립현대무용단 연습실에서 만났다.
홍승엽 감독은 국내 현대무용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무용계에서는 ‘독립군’, 스스로는 ‘외딴 섬’이라고 불릴 만큼 주류에서 벗어난 무용인이었기 때문에 그가 국립현대무용단의 장을 맡게 됐을 때, 많은 이들이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무용가 홍승엽의 태생은 남달랐다. 홍승엽 감독은 대학에서 평범한 공대생으로 섬유공학을 전공하다가 스물이 넘은 나이에 현대무용에 입문, 데뷔 2년 만에 ‘제14회 동아무용콩쿠르’ ‘대한민국무용제(현 서울무용제)’ 등 국내 최고 권위의 무용 콩쿠르를 석권하며 주목 받았다. 좀 더 전통적인 무용을 배우겠다는 생각에 유니버설발레단에서 3년간 활동했고 무용가로 데뷔한지 7년이 되던 1993년, 민간 최초의 전문무용단 ‘댄스시어터 온’을 창단해 다수의 무용인을 발굴했으며 국내 안무가로는 최초로 ‘프랑스 리옹댄스비엔날레’에 초청되는 등 성공적인 유럽무대 진출을 이끌어냈다. 국립현대무용단에서는 2011년 창단 공연 <블랙박스>를 비롯해, <수상한 파라다이스>, <호시탐탐>, <아Q>, <벽오금학> 등을 무대에 올렸다. 국립현대무용단은 오는 7월, 창단 3년 만에 무용의 본고장인 독일에서 공연을 펼친다. 지난해 발표한 홍승엽 예술감독의 공연 <호시탐탐>을 7월 8일 뷔츠부르크 시립극장 초청 공연을 시작으로 바트홈부르크 극장, 베를린 축제극장 등에서 세 차례 무대에 올린다. 홍승엽 감독은 임기를 마친 뒤 곧바로 개인 활동에 들어간다. 독일 올덴부르기쉐 주립극장의 초청을 받아 신작 공연을 펼치는 것. 홍승엽 감독은 8월 3일, 독일로 출국해 연말 공연을 준비할 계획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많은 공연의 오픈 리허설 행사를 열었다. 국내에서는 흔치 않은 풍토이고 무용수 입장에서는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관객들을 리허설 무대에 초청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티켓 세일즈를 위한 측면과 좀처럼 현대무용을 접할 수 없는 청소년들에게 현대무용을 소개하고 싶어서다. 경제적인 문제보다는 아예 현대무용이라는 예술 장르를 볼래야 볼 수 없는 그런 환경들이 많다. 무용수들이 땀에 흠뻑 젖어가면서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정말 진지하게 열심히 하는구나. 새로운 걸 만들어가는 구나’를 깨달았으면 좋겠다. 진실한 에너지를 경험하면 예술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질 거라 생각한다.
<개와 그림자>의 경우 13명의 무용수가 출연한다. 군무도 있지만 대부분 무용수들의 동작이 단독적이다. 안무를 만들 때, 작은 동작 하나하나까지 안무가가 만드는가? 아니면 무용수 개인이 자신의 동작을 창작하는 경우도 있나?
5년 전까지만 해도 안무의 95% 정도를 무용수에게 일일이 다 만들어줬다. 하지만 국립현대무용단원들은 경험이 많고 자기 표현이 충분히 되는 무용수들이기 때문에 개인의 아이디어, 변형을 존중해줬다. 말하자면 완벽하게 내 것도 그들의 것도 아닌, 함께 만들어진 작품이다.
안무가로서 <개와 그림자>공연을 소개한다면?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에서 받은 영감을 이솝우화 ‘개와 그림자’로 연결한 작품이다. 우화는 개울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입에 문 고기를 빠뜨리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개와 그림자>에서 그림자는 껍데기 혹은 ‘허상적 자아’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개가 거울을 보면 그 모습이 자신이라는 걸 모르지만, 사람은 항상 거울을 보며 그것이 자기 본질로 착각할 수 있지 않나. 자아를 볼 때 내가 보는 모습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주어진 조건에 따라서는 그 자아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대무용은 ‘어렵다,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안무가 입장에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떤 형태로 만들어서 에너지를 전달하고 이미지를 전달하는 작업’이 현대무용이다. 우선 공연을 부담 갖지 말고 보러 왔으면 좋겠다. 처음부터는 이해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작품에 빠져들다 보면 호기심이 생기고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벽오금학>, <아Q>, <호시탐탐> 등 홍승엽 감독이 지금까지 선보인 작품들은 안무의 밀도가 굉장히 높다. 매우 까다로운 안무가이자 예술감독일 것 같다. 프로젝트 단위로 오디션을 보고 무용수를 선발했는데, 선발 기준은 무엇이었나.
나는 무용수들에게 내 동작을 철저하게 요구하는 안무가다. 한국 현대무용계가 때때로 게으름 작업들을 하는 걸 볼 때 안타까울 때가 있는데, 새로운 안무를 창조하는 것보다 기존에 발표된 좋은 안무 여러 개를 엮어 무대에 올리는 걸 보면 답답하다. 오디션을 볼 때 내가 만든 기준은 없다. 대학 입시의 경우 80, 90%가 규격화 되어있는데 나에게는 그 기준이 50%도 해당되지 않는다. 심사를 할 때 이미 작품을 완성해놓고 무용수를 뽑는 게 아니다. ‘이런 작품을 하고 싶다’라는 윤곽이 잡힌 채로 오디션을 보는데, 어떤 무용수를 보면 그 사람이 가진 에너지를 꼭 쓰고 싶다는 생각을 주는 경우가 있다. 그런 무용수를 뽑게 된다.
신체적인 기능이 기본 조건이 되겠지만 무용수의 예술적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예술적 기질이 얼마나 깊이 있게 들어가 있나,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 더 요구하는 건 진실성의 문제다. 자기 표현에 있어서 얼마나 진실한가와 상통한다. 표현의 깊이라 던지 테크닉의 수준을 말할 때 진실성이라는 건 별개의 문제인 것 같지만 모두 묶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진실된 표현을 깊이 있게 할 수 있는 것, 더 깊이 있는 진실을 끌어낼 수 있는 것도 예술적 스킬이다. 단순한 스킬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스킬이다.
현대무용 전공자들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인가.
우선 무척 소탈하다는 점이다(웃음). 발레 전공자들이나 다른 분야 사람들을 보면 어쩜 그렇게 예쁘게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는데, 현대무용을 하는 사람들은 다 떨어진 트레이닝복도 아무렇지 않게 잘 입고 다닌다. 하지만 정작 공연 연습에 들어가면 집중하는 에너지가 차원이 다르다. 발레공연에서 주역 이상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뽑아 낸다.
대개 안무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
보통 6, 7월 즈음에 공연하면 5월 쯤에 안무가 완성된다. 신작 공연이 올라가기 전까지 나는 불안하다. 머릿속에 깡통이라서(웃음). 연극은 텍스트가 있고 그것을 연출자가 연출하면 되지만 현대무용의 경우 완전히 제로에서 시작한다. 알갱이를 찾기 위해서 계속 채집을 하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머물게 되는 곳이 있다. 현대무용 창작에 있어서는 어떤 걸 소재로 하는 것보다 어떤 방식의 표현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전과는 다른 표현 방식을 찾는 것이 안무가로서의 역할이다.
현대무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음악이다. 무용수들에게 음감은 어떤 의미인가.
제대로 된 무용인들에게는 몸 안에 음악이 있다. 몸 자체에서 음악을 만들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무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모르는 무용인들도 의외로 많다. 박자만 아는 경우다. 음악을 춤추는 공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몸에 음감이 없는 거다. 하지만 뒤늦게 무용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엄청난 사람들이 많다. 클래식의 경우에는 어릴 때부터 교육을 통해서 만들어진 경우가 많지만, 현대무용은 자기 기질을 누르다 누르다 참지 못하고 하게 된 사람들이 많다.
평범한 공학도에서 스물이 넘은 나이에 무용계에 데뷔했다. 당시, 남자 무용가가 흔치 않은 시절이었는데 어떤 계기로 무용을 하게 되었나.
30년 전에는 남자가 무용을 한다는 생각을 감히 쉽게 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 치면 남자가 아이를 낳는다는 수준이었을 거다. 꽂히면 벗어나기 힘든 게 예술이다. 특히 음악이나 무용 같은 장르는 교육받고 훈련 받아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 사람에게 기질이 있기 때문에 안 할 수가 없는 거다. 환경적인 면 때문에 모르고 지내다가, 어떤 동기에 의해서 꿈틀대고 시작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접속이 되면 다른 것을 하기 힘들다. 내가 생각하고 찾는 게 아니라, 점령되어버리는 거다.
유니버셜 발레단으로도 활동했는데 발레를 한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무용을 시작하고 1년도 안 지나서 발레와 함께 배웠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이 생기면 발레를 배웠다. 나에게는 현대무용과 발레, 두 분야를 다 했다가 아니라 춤의 기초가 되는 부분을 가지고 있겠다는 개념이다. 국립현대무용단도 1주일에 현대무용 수업을 세 번, 발레 수업을 두 번 진행하고 있다. 외국 현대무용단의 경우를 살펴봐도 우리와 비슷하게 수업을 하고 있다. 아마 내가 무용을 좀 더 잘 알았다면 발레를 먼저 배우고 창작을 했을 거다. 막연하게 무용은 어릴 때부터 해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현대무용을 시작했는데, 뒤늦게 발레를 시작한 남자 무용수도 많더라. 내가 원하는 춤을 잘 추면 되는 거지, 굳이 배타적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1993년에 민간 최초의 전문 무용단 ‘댄스시어터 온’을 창단했다. 현대무용에 입문하면서부터 줄곧 안무가 역할도 겸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찍부터 창작자의 역할을 맡은 것이 도움이 되었나?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의 동작을 따라 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군무 같은 경우에는 안무가가 만들어준 동작을 습득했지만, 남자 무용수가 많지 않았던 터라 개인적인 동작 같은 것은 거의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무용수일 때부터 이미 안무자로서 훈련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좋은 경험은 아니다. 내가 무용수로 활동할 때 부러웠던 것은 외국 무용수들이 안무가와 서로 교감하며 작업하는 모습을 볼 때였다. 선배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그 사람들의 예술성을 받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없어 아쉬웠다.
2010년 국립현대무용단이 창단되며 초대예술감독으로 임명됐다. 초대 감독이었기 때문에 책임감이 더욱 막중했을 것 같다. 3년간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초대예술감독의 자리를 수락한 것은 단순히 내가 하고 싶다는 생각 만으로 뛰어든 게 아니고 내가 이 분야에서 꼭 할 일이 있겠구나, 라는 예감을 충분히 했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무용단을 꾸리면서 어떤 일의 과정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부분이 있었지만, 의미 있는 작업과 성과가 충분히 있었다고 본다. 예술의전당 서예관에 국립현대무용단 연습동이 만들어진 게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이 이뤄졌다. 현대무용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가지를 치게 된 거다. 또 해외 및 국내안무가 초청공연, 기획 공연, 안무가 베이스캠프 등 의미 있는 작업들이 많았다.
현대무용은 순수 예술이기 때문에 대중문화처럼 다수의 관객과 소통할 기회가 없다. 아쉬운 마음은 없는지?
현대무용은 다수의 예술이 되지 못한다. 이 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예술로 가능성이 있는 것은 이미 상업예술로 넘어갔다. 어떤 예술은 어떤 시대라도 순수 예술일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로 가기보다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예술에 도전하려면 소수의 팬 층밖에 확보하지 못한다. 예술이 가지고 있는 평생의 업보인데, 현대무용은 그 업보가 가장 큰 분야다. 현대무용은 검증되지 않은 창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대중적인 예술이 된다는 건 모순이다. 대중적인 시장을 확보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무용이 국제적인 시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 외국에서도 이런 예술에 대해서는 대중화를 접목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에 극장과 극장 간에 연계가 서로 잘 되어 있다. 순수예술 분야는 페스티벌, 투어를 자주 하게 되는데, 관객이 많지 않기 때문에 무대를 옮겨 가며 관객들을 만나야 한다.
처음으로 현대무용 공연을 접하는 관객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공연장에 오면 느낄 것이다. 현대무용은 난해하고 교양인으로서 갖춰야 할 숙제가 아니라, 관객들 스스로 호기심이 발동하고 몸이 움직이는 걸 느끼는 순간 알게 되는 예술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예술을 향유하는 것보다, 내 안목에서 찾아낼 수 있는 아름다운 예술을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현대무용과 소통할 수 있다. 현대무용을 대중화 시키겠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건 모든 객석이 무용인으로 채워지는 공연이 아니라 일반인들과 함께 섞여서 공연을 만들어가고 싶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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