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부터 1956년까지,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한국전쟁의 시간들. 조선희 장편소설 『세 여자』가 조명하는 지난 시간들이다. 이 소설의 시선이 닿는 공간 또한 광활해서 여기에는 경성과 평양, 상해와 모스크바, 크질오르다까지 등장한다. 역사의 복판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 그들의 투쟁과 서글픈 일생을 생생하게 그리는 『세 여자』는 그것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어긋났던 퍼즐 조각이 다시 맞춰지는 감각을 선사한다. 이 시기를 제대로 살피는 일이 과연 현재를 제대로 지켜보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씨네21> 편집장과 한국영상자료원 원장, 서울문화재단 대표 등을 지낸 조선희는 이 작품을 2005년에 집필하기 시작했다. 허정숙이라는 놀라운 인물을 만난 덕이었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 암울한 시대, 1920년대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화사한 세 여자의 사진 한 장을 보고 이들을 주인공 삼기로 결심했다. 품고, 꺼내는 시간을 반복하는 동안 40대에서 50대를 맞은 작가는 ‘그녀들과 함께 백 년 넘게 산 기분’이라고 말했다.
너무나 화창하고 깨끗해요
역사의 그늘 아래 묻혀 있던 인물들을 재호명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써야 했던 이유랄까요. 어떻게 이 이야기를 쓰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2000년대 초반이었어요. 말하자면 사회주의 계열의 인물들에 관한 연구가 시작된 게 1990년대 이후죠. 공산권이 무너진 후부터잖아요. 그 당시에 관련된 책, 기사 등을 보다가 허정숙을 발견한 거죠. 결혼을 다섯 번 했고 성이 다른 아이를 몇이나 낳았다는 이야기, 중국으로 무장 투쟁하러 갔었고 평양으로 갔다는 이야기들이었어요. 먼저 사적인 부분들도 신기했죠. 냉전시대에 교육을 받고 책을 읽은 세대라 ‘신여성’이라고 하면 거의 나혜석만 있는 줄 알았고요. 독립운동이라면 김구나 유관순이었거든요. 일단 허정숙이라는 이름부터가 생경했는데 그의 삶이 참 흥미진진했던 거예요.
허정숙이 먼저였군요.
네, 허정숙을 들여다보니까 주변에 있던 또 다른 여자들도 보이고요. 주변의 남자들까지 보이면서 점점 재미있어졌어요. 그러다가 (표지 수록)사진을 발견한 거예요. 제게는 이 사진이 굉장히 신선했어요. 1920년대는 암울한 시대인데 이 사진은 너무나 화창하고 깨끗해요. 밝고 화사하잖아요. 세 여자들도 정말 구김살 없는 모습이죠. 이 이미지가 제게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일단 세 여자를 큰 줄기로 해서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어요.
허정숙에 관한 자료는 다른 두 여자, 주세죽과 고명자에 비해 많았다고 들었어요. 역사적 사실이 아주 많이 들어간 작품이라 쓰면서도 고심한 부분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사실과 허구의 균형이 중요한 문제였을 텐데요.
역사 속 실재했던 인물들로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면 자세가 달랐을 거예요. 그랬다면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멋대로 각색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세 여자이기도 하지만요. 동시에 역사 그 자체가 주인공이기도 하거든요. 저는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역사의 역설들, 거짓말들, 그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거든요. 때문에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해 하나의 허구의 공간을 만들어야 했어도 그것이 역사 기록의 틀을 벗어나지 않도록 나름대로 절제를 하면서 썼죠. 말하자면 소설이 역사를 배반하지 않도록 하려고 주의했던 거예요.
소설에 이름 석 자가 정확히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실제 인물이라고 하셨죠.
맞아요, 그리고 날짜가 명시된 부분도 모두 사실이에요. 인용 부분도 모두 실제 자료고요. 그렇게 저를 말하자면 앵커로 해서 역사적 사실들을 적고 주변을 메우는 방식으로 썼다는 것을 적시하고 싶었어요. 이런 방식으로 말이에요.
강조하고 싶었던 것들
프롤로그에서 주세죽의 딸 비비안나 박의 목소리로 ‘어머니를 그런 무서운 고독에 살게 만든 건 시대였다’고 말해요. 허정숙을 가리키며 ‘여자들이 치르는 전쟁이 더 치열했다’고도 했는데요. 여기에 집중해서 읽어도 좋을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특히 허정숙의 목소리로 당시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더 큰 문제들에 대해 많이 말하고 있잖아요.
말하자면 이 소설에서 허정숙이 사회를 보는 역할을 하고 있죠. 세 인물 중 특히 허정숙은 그 시대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주체적인 인물이거든요. 아무리 공산주의자고 투사라고 해도 개인이 시대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주세죽, 고명자 같은 경우 남자들 뒷수발을 하거나 휘둘리는 인생을 살았던 거고요. 반면 허정숙은 자기 주관이 너무나 확실하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도 대단히 확실했던 인물이에요. 실제로 <신여성>이라는 잡지의 편집장도 했고요. 다른 두 인물과는 색깔이 달랐죠. 젠더 의식이 아주 강하게 있었던 인물이거든요. 그러니까 정숙이 당시 시대와 더 날카롭게 부딪쳤을 것 같아요. 자료도 많이 나와요. 아버지 허헌이 딸을 기숙신학교에 보냈는데 거기를 뛰쳐나오고, 상해로는 가지 못하게 했는데 간 건 모두 팩트죠. 이런 것들을 선연하게 드러내고 싶었어요.
세 남자는 낮에 조선일보에서 일하고 밤에는 훈정동 집으로 몰려갔다. 낮에는 신문기자, 밤에는 공산청년회의 이중생활이었다. 신문기자라 하나 경영난에다 정간을 밥 먹듯 하니 월급이 나오다 말다 했다. 훈정동 아지트키퍼 세죽은 부엌을 벗어나지 못했고 정숙은 그게 불만이었다.
“너, 밥하는 거 배우려고 유학 갔니?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체제를 뒤엎자고 혁명하는데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건 이율배반이야. 남편과 아내 사이라도 말이야.”(『세 여자 1』, 133-134쪽)
이야기의 현재성에 대해 많이 생각했거든요. 한 갈래가 방금 이야기한 ‘여성’이라는 측면이라면 다른 갈래는 ‘지금 한국사회는 해방공간, 한국전쟁의 연장선에 있다’는 말에 있는 것 같아요. 해방공간을 제대로 조망하는 게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요.
정말 그렇죠. 아주 평화롭고 멀쩡한 일상을 살고 있지만 사실 계속 뒷골이 당기는 거잖아요. 우리는 분단이라는 상황, 전쟁의 위협 같은 것들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일상생활을 하고 있어요. 이것들은 전부 식민시대,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고요. 우리 사회에 이념으로 편을 가르는 것이 거의 습관처럼 존재하잖아요. 정치적으로 극렬해지는, 쉽게 격앙되는 사회적 에너지가 있는데요. 그것이 해방공간의 트라우마, 그것의 연장선이 아닌가 생각을 해요. 2권에는 그런 판단들, 당시 지식인들의 정치적 판단에 대해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려고 노력을 했어요.
1권에서 다룬 ‘101인 사건’, 2권의 ‘반탁운동’ 등 몇 군데 저자의 아쉬움이 읽히는 대목이 있어요.
해방공간은 정말이지 ‘모스크바 3상회의’가 하나의 블랙홀이 되어서 모든 다른 이슈를 다 빨아들여버렸어요. 그것 때문에 거의 내전이 벌어진 거거든요. 좌우가 다시 확 갈라졌고요. 그 전에는 친일이냐 아니냐, 민족이냐 친일이냐 하는 구도였는데 모스크바 3상회의 때문에 프레임이 바뀌었어요. 친일파도 반탁 머리띠만 두르면 다시 애국자가 됐죠. ‘미-소 공동위원회’ 같은 것은 사실 분단 문제를 해결하는 절차였는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사회가 이성을 잃었다고 할까요. 이 이야기는 진짜 강조하고 싶었던 거예요. 학창 시절에는 우리가 약소국이라 미국과 소련 강대국에 의해 분단되었다고 배웠잖아요. 물론 분단의 단초를 놓은 건 미국과 소련이지만 그것을 고착화시킨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건 한국의 정치인들이거든요. 그런 걸 정확히 알아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어요.
인물에 대한 재평가 의도도 있었던 것 같아요. 어땠나요?
당연히 그래요. 말하자면 잊힌 역사를 복원한 거잖아요. 우리가 역사 인물에 대해서도 가치판단을 하는데요. 시대에 따라 판단이 다르죠. 기준이 달라지는 건데요. 상대적으로 저는 백범 김구가 조금 과대평가 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독립운동가로서의 김구, 1945년 이전의 김구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백범일지』를 보면서 엄청 감동 받았고요. 그런데 사람 인생이 길어서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옳지는 않을 수 있죠. 그러니까 저는 1945년 이전의 김구는 옳았지만 그 후 한 4년 동안 그가 한 실책들은 1945년 이전에 쌓았던 업적들을 다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는 그런 실책이었다고 생각해요. 냉전구도에서 마땅한 민족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어쨌든 김구가 약간 우상화된 면이 있고요. 그런 면에서 조금 냉정하게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몽양 여운형에 대해서도 조금 다른 시각이 있었어요.
여운형은 실제로 저평가 된 게 사실이죠. 여운형도 1990년 이후에 조명되기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해방공간에서 그 상황을 가장 넓게 보고 멀리 봤던 사람은 여운형이었던 것 같아요.
냉전시대가 끝나고 우리 사회에서 과거사 재조명 노력이 이어졌지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아요. 특히 북쪽 인사들의 경우, 여전히 낯설죠.
김구나 여운형은 어쨌든 남한의 역사 속에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북으로 간 사람들, 그들은 북에서도 잊혔거든요. 숙청당한 사람들은 그렇잖아요. 남과 북에서 모두 잊혔죠. 그런 인물들 중에서는 최창익이라는 인물을 가장 중요하게 복원했다고 할 수 있어요.
특별히 최창익에 집중한 이유라면 무엇일까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최창익은 주인공 허정숙의 남편이기도 했고요. 북한 초창기에 정치 세력은 크게 보면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파’가 있었고, ‘소련파’, ‘남로당파’, ‘연안파’가 있었는데요. 김일성은 어떻게 생각하면 분단이 되면서 소련 군정이 들어왔다는 사실 때문에 간택된 낙하산(웃음) 같은 존재죠. 정치적으로 운이 어마어마하게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상대적으로 역량에 비해 역사의 뒷장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박헌영과 최창익이에요. 남로당파가 박헌영을 중심으로, 연안파가 최창익을 중심으로 위계화 되어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이 둘이 중요하게 다뤄질 수밖에 없는 거죠.
맞아요, 정말이지 운이 좋은 사람이 참 많다는 생각을 했었어요.(웃음)
그럼요. 해방공간의 남한에서도 정치인들이 여럿 뜨고 지지만 결국 이승만이 되잖아요. 두 가지 같아요. 운과 본인의 권력 의지죠. 운은 곧 타이밍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그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웃음) 그런데 김일성 같은 경우는 권력 의지도 의지지만 어쨌든 당시에 소련군 대위였다는 것이 무척 크게 작용했고요. 소련 군정이 북한 정권을 구성할 때 그 사실이 당연히 김일성으로 하여금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했던 거죠.
이 대목에서 다시 또 허정숙이 빛났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뜨고 지는 동안 끝까지 자리를 지켜낸 인물이잖아요.
탁월하죠. 여러 요인이 있는 것 같아요. 일단은 김일성이 허정숙의 아버지 허헌을 굉장히 신뢰했던 것이고요. 또 허헌이 오래 살았다면 어떤 종류의 갈등이 있었을 거예요. 김두봉도 처음에는 환영 받았지만 말로가 처참하거든요. 그렇지만 허헌은 초창기에 김일성한테 큰 힘이 되어주고 안타깝게 사고사를 했죠. 그런 허헌의 딸이라는 사실 때문에 김일성이 끝까지 허정숙을 보호하려 했던 면이 있고요. 또 여자이기 때문에 자기의 정치적 라이벌로 생각을 안 했죠. 다른 하나는 허정숙이 계파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이것은 아주 독특한 점이에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조선공산당 활동할 때도 허정숙은 다른 파벌 남자와 사귀었거든요.
계파적이지 않은 허정숙의 선택이라는 건 굉장히 뛰어난 정치적 감각 같으면서도 정치적이지 않은 면이라 흥미로워요.
저도 사회생활을 했고, 어떤 정치 구도 안에 놓일 때가 있었지만요. 정말이지 파벌을 배반하기는 쉽지가 않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거듭 파벌을 배반하거든요. 그것은 이 여인이 대단히 강했던 거고요. 자신의 감정, 직관으로 자신의 사회적 관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강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나중에 북한에서 파벌들이 단체로 숙청되는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죠. 계파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으니까요. 너무나 안 정치적이었기 때문에 그 정치판에서 살아남았던 거예요.
역사의 내적인 흐름들
이밖에 쓰면서 마음에 남았던 인물이나 사정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볼 때마다 목이 메어왔던 장면들이 있어요. 1929년 김단야가 서울 도화동 집에서 고명자와 살다 소련으로 떠나죠. 그때의 이별. 그것은 영원한 이별이잖아요. 꼭 일터 나갔다 저녁에 호떡이라도 사갖고 돌아올 것처럼 떠났다, 고 썼는데요. 이것은 그게 마지막이겠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정말 목이 메는 거죠. 그 하룻밤을 같이 지내는 장면이 그래요. 누군가는 소설에 베드신이 왜 이렇게 없느냐(웃음)고 하던데요. 그 마지막 밤, 거기에 어떻게 베드신을 넣을 수가 있겠어요. 그런 상황에서 말이에요.
또 하나는 허정숙이 경성을 떠나 중국으로 갈 때인데요. 당시는 전화(戰火)가 불붙는 상황이었고, 일본이 파죽지세였기 때문에 중국으로 간다는 건 곧 사지로 가는 거였거든요. 아들과 아버지를 경성에 두고 떠날 때는 아마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떠나는 장면을 긴 호흡으로 썼는데요. 아마 굉장히 비장했을 거다, 생각했죠.
고명자의 외로운 죽음 장면도 마음에 많이 남아요.
실제로는 그렇게 안 죽었을 가능성도 많아요. 한국전쟁 초창기 근로인민당사에서 의용군 모집할 때 고명자가 거기 나와 있는 모습을 누가 본 것이 마지막 기록이거든요. 어떤 기록에 보면 고명자가 퇴각하다 폭격을 맞아서 죽었다는 기록도 있고요. 사실 고명자에 관해서는 거의 창작이거든요. 수예라는 코드가 고명자의 일생에 굉장히 중요한데요. 그것도 실은 창작이에요. 그런데 제가 고명자를 사고사로 다루고 싶지 않더라고요. 죽음 자체를 좀 더 차분하게 다루고 싶어서 그렇게 그렸죠.
사실은 소설이 출간된 후 고명자의 사촌동생 분을 만났어요. 아마 그분을 미리 만났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소설을 끝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요. 쓰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나 다시 생각하게 된 부분이라면 무엇일까요?
우리 세대는 대학에서 역사 공부를 많이 했어요. 때문에 저도 이런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거예요. 만약 이것이 너무나 낯선 정보였다면 아예 엄두도 못 냈겠죠. 그럼에도 소설을 위해 자료를 들여다보니까 정말 모르는 게 많더라고요. 여기 나오는 이야기의 90%는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던 것 같아요.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해서도 정확한 내용이 뭔지, 그에 따라 국내 정치인들이 어떤 식으로 이합집산 했는지, 결과적으로 사태가 어떤 식으로 발전했는지, 이런 것에 대해서는 사실 거의 모르잖아요. 때문에 저도 소설을 쓰는 동안 역사의 내적인 흐름이랄까 이런 것을 거의 처음 들여다본 거예요. 재미있던 것은 해방공간에서 허정숙은 북한 권력의 핵심에, 고명자는 여운형의 바로 곁에 있었던 것이죠. 이런 것들은 당시 상황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기에 굉장히 좋은 위치였다고 생각해요.
한 장의 사진으로 소설을 결심했을 당시에는 이런 진행은 생각도 못했을 텐데 참 놀라운 일이에요.
허정숙과 고명자도 그렇지만요. 주세죽도 그렇죠. 소련의 조선인들이 겪은 가장 극명한 사건이 강제이주잖아요. 그런데 하필이면 주세죽이 유형을 카자흐스탄으로 갔기 때문에 그 사람들과 만나요. 그런 것도 우리가 이 세 여자를 통해 민족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아주 절묘한 면이라고 생각해요.
에필로그에 등장한 목소리여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주세죽의 딸이 끝내 엄마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무척 절묘한 역사의 한 장면이라고 느꼈거든요. 그 시대를 살았던 세대를 다음 세대는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잖아요.
비비안나는 스탈린 세대죠. 그래서 주세죽은 딸로부터 전혀 이해받지 못했어요. 그 자신이 정치적으로 굉장히 박해 받은 사람인데 딸과의 세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고독하게 삶을 마감했죠. 아마 그런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중국에서도 문화대혁명 때 부모 자식 간에도 그런 일들이 있었잖아요. 비슷하겠죠. 그런데 정말 그 시대는 역사의 장난이라고 할까요, 눈 먼 역사의 흐름에 치어 비운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요.
역사의 내적인 흐름을 이해하고 오늘을 사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늘 하는데요. 그런 차원에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도 있을까요?
우리 세대의 딜레마라면 말이죠. 사회적으로는 반공 상식이 있는데 대학에서는 공산주의를 하나의 대안으로 보는 바람이 확 불었다는 거예요. 그 양쪽이 다 정리가 필요한 부분 같아요. 이 소설을 쓰면서 저도 제 젊은 시절의 정치적 환경에 대해 한 번 정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지금 우리 사회에 대한 생각들과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하는 부분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고요. 많은 분들이 그럴 기회를 가진다면 좋을 거예요.
이데올로기에 대해 정리된 저자의 생각,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공산주의는 1848년 ‘공산단 선언’으로 시작됐죠. 19세기에는 이것이 하나의 사상으로 존재했는데요. 20세기에 이것이 전 지구적인 투쟁의 주제가 된 거죠. 그런데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그 투쟁이 이미 종료가 되어버렸어요. 90년에 공산권이 해체되잖아요. 지금은 북한 정도가 남았지만 그건 이미 하나의 봉건 파시즘 체제지 소비에트 체제라고 볼 수 없고요. 그렇다면 공산주의란 무엇인가, 이 세 여자들은 쓸데없이 고생만 한 건가 하는 의문이 들죠. 그러나 저는 공산주의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타락하지 않았다고 봐요. 마르크스주의라는 게 대안으로 떠오르지 않았다면 자본주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사악해졌을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가능해졌던 건 공산주의와의 대경합의 시대, 냉전시대라고 부르는 시대를 지나면서 같아요. 자본주의가 수정자본주의가 되고 서방진영이 대항 이데올로기의 장점을 흡수해 더 체질이 강해질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에필로그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셨어요. 마르크스의 이론과 레닌의 혁명이 ‘자본주의 세계를 더 인간답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었다.’라고요.
소비에트 체제라면 우리가 더 가까울 거예요. 기초 단위의 의회나 행정의 거버넌스 체제를 보면 그래요. 완전히 거미줄처럼 작동하잖아요. 예술인 지원도 다 민간인이 들어가서 심사하고요. 이게 말하자면 소비에트거든요. 저는 지금 한국 사회가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면에서는 아주 진화한 사회라고 생각해요. 노동자에 관한 법 같은 것은 나날이 개선되고 있잖아요. 이처럼 공산주의 장점을 통해 대중 민주주의가 훨씬 발달할 수 있었다고 보는 거죠. 지금도 경제민주화 등이 큰 이슈고 빈부격차도 심하지만요. 그래도 이런 대립 덕분에 전체적으로 자본주의가 조금 더 조심하면서 인간적인 형태로 발전되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요. 21세기에 공산주의란 더 이상 체제나 이념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니 종북좌파니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되레 이상한 거죠. 이제 공산주의는 가치관, 철학, 정책의 문제로 남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어려운 작업을 마무리하셨는데요. 다음 계획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이게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당분간은 글을 못 쓸 것 같아요.(웃음) 그런 생각은 해요. 살다보면 쓰고 싶어질 때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죠. 최근 읽은 소설 중에 『옅푸른색 잉크로 쓴여자 글씨』라는 짧은 장편이 있는데요. 아주 복잡하고 긴 이야기가 아니라 간단하면서 극명한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에 확 끌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더라고요. 지금 소설을 생각하는 건 전혀 아니고요.